◇경찰청 [총경 전보] △홍보담당관 서성목 △청문감사담당관 이태규 △정보화정비과장 류재응 △보안과장 이희석 △112종합상황실장 하재철 △생활안전과장 박병기 △여성청소년과장 박천수 △형사과장 오지형 △과학수사과장 유병조 △마산동부서장 공용기 △진해서장 심태환 △진주서장 김정완 △김해중부서장 김한수 △김해서부서장 정재화 △사천서장 정창영 △밀양서장 박준경 △합천서장 김오녕 △창녕서장 김태경 △고성서장 오동욱 △남해서장 김동욱. △경무과 교육 한정우. △홍보담당관 김형철 △정보화정비과장 강일웅 △수사과장 정성학
삶의 터전이자 놀이터였던 낙동강 풍경이…강일웅 (76·서울·사진작가)이맘때면 아련한 그 시절 그 추억 또렷여든 앞둔 나이에도 늘 그리운 모습들1945년 봄, 아버지는 느닷없이 부산 동래에서 여섯 남매를 대리고 외갓집이 있는 김해군 명지면 순아도 3구로 이사를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낯선 시골 생활이 즐겁기만 했다
명규>> 지난 주말 롯데마트와 메가마트 주변의 김해대로 일부 구간은 밀려드는 차량들 때문에 무척 혼잡했다. 대형마트들의 할인 경쟁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도로를 이용한 시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내년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외동에 들어설 계획이다. 벌써부터 백화점 일대의 교통난을 걱정하는 시민들이 많다. 하지만 유독 김해시만 아무런
1958년 김해들판에서 농악놀이가 펼쳐졌다. 옛날에는 모내기를 하는 봄이나 벼베기를 하던 가을, 또는 설 같은 명절에는 어느 마을에서나 농악놀이를 즐겼다. 농악놀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사진으로 보는 옛 김해' 연재를 마친다. 2013년 7월 로부터 사진 연재 제의를 받자, 마음은 생활에 바빠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달려가
1958년 여름 외가가 있던 당시 김해군 명지면 해척. 한 소년이 들판에서 흰염소와 장난을 치고 있다. 소년과 염소의 표정이 너무 순수하고 아름답다. 옛날에 아이들은 소나 염소를 데리고 산이나 들판에 나가 풀을 먹이곤 했다. 매일 이렇게 하다보면 소나 염소는 동물이 아니라 마치 소년과 친구처럼 다정한 사이가 된다. 아이들은 소에 올라타기도 하고 염소와 머리
김해의 마을 어르신들이 옛 선비들의 전통놀이였던 골패를 즐기고 있다. 골패는 구멍의 숫자와 모양에 따라 패를 맞추는 전통적인 놀이로 강패, 아패, 호패라 불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화투를 전파하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져버렸다. 골패는 어른을 상좌에 모신 상태에서 한지 위에 32장의 골패를 엎어놓고 오른손으로 시계바늘 방향으로 젓는 놀이였다
1959년 여름 부산대학교 사진부 부원들과 함께 대저면에서 촬영을 한 뒤 돌아가는 길이었다. 유난히도 황홀한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한 쌍의 연인이 대저면 둑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세월 따라 사랑의 풍속도가 많이 달라졌음을 말해주는 사진이다. 1950~60년대만 해도 연인들은 데이트를 할 때 한 두 걸음 간격을 두고 걸었다. 지금은 도심의 건널목에서 신호를
1958년 설을 며칠 앞둔 어느날 한 어린이가 한적한 김해평야의 벌판에서 북 치는 연습을 하던 아빠가 잠시 쉬는 사이 대신 북채를 잡고 있다. 북을 어떻게 치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 가득하다. 당시에는 명절이 다가오면 마을마다 놀이패가 구성됐다. 이들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벌판으로 나가 미리 연습을 하곤 했다. 특히 김해는 넓은 평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1959년에 을숙도 방면으로 촬영을 하러 갔다. 촬영을 마칠 무렵, 석양을 배경으로 돛단배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위로는 한 무리의 철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영남을 관통해 흘러온 낙동강이 강의 일생을 마치고 남해바다와 합류하기 직전에 철새들의 낙원인 을숙도가 있다. 넓은 김해 평야가 인간을 먹이는 사이 을숙도는 철새들을 살리는 휴식처가 됐다. 철새
1959년 한 농부가 지게에 나뭇가지를 잔뜩 짊어진 채 구포다리 옆의 김해 대저면 둑길을 걸어가고 있다. 지게꾼의 다리는 그다지 굳세어 보이지 않지만 바지를 반쯤 걷어 부치고 씩씩하게 집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은 박물관이나 민속촌에 가야 볼 수 있지만, 지게는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운반도구였다. 지게꾼이 걷고 있는 둑길은
1959년 부산대학교 사진예술부 회원들이 구포와 대저면 일대에 단체 촬영을 하러 나갔다. 한 아낙이 양철 대야에 무엇인가 담은 채 긴 널판지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고 있었다. 저 멀리 뒤에는 지금은 철거돼 없어진 추억의 구포 다리가 길게 가로질러 놓여 있는 장면이 보인다. 길이 1천60m였던 구포다리는 개통 당시만 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2003
1955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명지에 있는 외가댁 마을 입구에 솟대가 세워져 있었다. 가식이 전혀 없는 솟대와 나즈막한 초가집이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전원의 풍경이 내가 꿈꾸는 이상세계인 듯, 그 시절 그리움에 젖어본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신앙 대상물이다. 옛날 사람들은 주로 음력으로 정월이나 10월 초 동제
선풍기는 1970~80년대나 돼서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무더운 여름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 쬐는 한여름이 되면, 바람이 잘 통하는 집 마당의 키다리 포플러나무 그늘 아래 모두 모였다. 매미는 지칠 줄 모르고 요란하게 울어댔다. 때로는 마당 한켠에 왕대나무를 몇 개 얼기설기 묶어 볕을 가리고,
1975년 '아름 사우회' 회원들과 을숙도로 철새를 찍으러 갔다. 큰 고니들이 낙원 위를 나는 듯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당시만 해도 을숙도는 김해 지역이었다. 1978년 김해군에서 부산시로 편입됐고, 1983년 강서구에서 사하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당시 을숙도는 대부분 저습지여서 홍수 때는 수몰 위험이 높았다. 따라서 섬 크기에 비해
1959년 부산대 사진부원들과 대저면으로 사진촬영을 하러 갔다.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던 한여름, 구포다리 아래에서 수건을 둘러쓴 아낙들이 도란도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식수용 수도시설조차 부족하고 당연히 세탁기는 없던 시절, 아낙들은 더러워지기 쉬운 흰옷을 자주 빨아야했다. 이들은 거의 매일 우물이나 냇가, 강가에 모여 빨래를 했다. 그 때 빨래터는 속
1959년 부산대 사진부원들과 대저면 일대를 촬영하고 둑 아래 큰 길을 따라 이야기꽃을 피우며 귀가하고 있었다. 한 농부가 쟁기를 지게에 얹은 채 소를 몰고 낙동강 둑 위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 아름다운 구름이 저녁 노을에 불타고 있었다. 즉시 둑 너머로 달려가 사진을 역광으로 찍었다. 밭고랑 같은 구름이 밭을 갈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마
김해 대저면과 부산 구포를 연결하는 구포다리는 1932년에 완공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1959년 태풍 사라호 때 일부 교각이 약간 침하하는 바람에 바다쪽으로 기울어진 다리를 걸어서 건너던 기억이 난다. 낙동강 물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구포 다리 부근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어부가 많았다. 무더운 여름철 한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앤드류 와이어스(1917~2009)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그림을 감명 깊게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미국의 광대한 대자연과 그 안의 사람, 사물을 정밀하게 그린 국민화가였다. 그 그림을 보면서 볼 수도, 보이지도 않는 바람을 잘 표현했다고 느꼈다. 나도 보이지 않는 바람을 사진에 한 번 담고 싶어 바람 부는 날 명지 신포에
1958년 김해 명지. 홀로 사시는 한 할머니가 초막집 지붕을 수리하기 위해 갈대 등을 정리하고 있다. 지금은 부산 땅이 돼 버린 명지에는 강변 등에 갈대가 흔해 초막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김해에는 초막집 외에 초가집도 많이 있었다. 물론 어디 김해 뿐이었으랴.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가 없었고 다들 가난했으니 농사를 짓고 나온 짚이나 갈대로
1958년 6월 18일 김해군 녹산면 산양리(현재 부산 강서구 녹산동) 조그만 마을. 막내 외삼촌이 장가가던 날이다. 요즘은 보기 힘든 전통혼례식 풍경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엄숙하던 식장이었지만, 누군가의 한마디에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함박웃음이 터졌다. 근엄하게 서 있던 신랑은 좋아서 입이 귀 밑에 걸렸다. 각시는 좋기는 한데 티를 못 내고 수줍어 다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