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할 무(茂), 시내 계(溪). 장유 무계리는 이름 뜻 그대로 대청천과 능동천, 피내천 등 많은 물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배후습지로 형성된 넓은 평지는 장유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밑천이 됐다. 120년 전부터 교통, 행정, 교육, 경제가 밀집돼 장유 1번지로 불렸던 무계리는 대청천을 따라 광석·무계마을로 나눠진다. 지석묘 등 돌과 연관돼 이름 붙은 광석마을옛 무계장터에 주민 3천명 모여 3·1운동십시일반 돈 거둬 용두산에 기념탑 건립오래된 정자나무 두 그루, 무계마을 지켜와당산나무 옆 가축시장 열려 소, 돼지 거래장유면 남·
맑은 물이 흘러 붙여진 이름 ‘대청’은어, 꺽지, 뱀장어, 메기 등 살아장유의 젖줄 대청천 덕에 곡식 풍부면 지역 최초로 비닐하우스 재배 시작1990년대 중반 신도시 개발 본격화현재 대규모 아파트 단지, 상업지 즐비"조선시대 때는 '경빈들'로 불렸다고 합니다. 갑오년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대부분 지역에서는 흉작으로 고생을 했지요. 옛날 대청천은 물길이 참 좋았습니다. 덕분에 이 물길을 이용하던 '경빈들'에만 풍작이 들었고, 장유 지역민들이 함께 그 곡식을 나눠 먹었답니다. 이후 '갑오들'
김해~양산 오간 파발마 머물던 역원 존재동네에 말 많다며 ‘마마리’라고 불리기도조선 때부터 창녕조씨·김해허씨 등 집성촌비닐하우스 농사 활발한 덕 늘 ‘은빛 바다’산업화 시작되며 한일합섬, 국향산업 설립군데군데 낡은 가옥, 골목길 아련한 향수"논밭에는 오곡백과가 영글고 산에서는 맑은 물줄기가 흘러 내렸지요. 안동은 김해에서 알아주는 부자마을이었답니다."안동은 삼방동과 지내동 사이에 위치한 공업지역이다. 예전에는 주민 대다수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1969년 한일합섬이 들어오면서 공장으로 뒤덮였다. 안동에서 13년간 통장을 맡았던
현재와 과거 혼재한 도심형 자연마을로 거듭나서로간 믿음 속에 마을 전체 함께 옮겨마을 곳곳에 옛 흔적 그대로 남아 있어1600명 마을주민 대부분 50대 이상 1/3 농사 종사‘고랑이’ ‘날가지’ 지명, 산과 물이 어우러진 마을마을 뒤 신도시 조성, 지대 낮아 침수 걱정도"이런 동네는 전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이가 좋았던 우리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가 싫어 다함께 마을 전체를 옮겨 왔습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외동사거리에서 장유방면을 향해 달리다 보면 무계지하도가 나타난다. 지하도 입구에서
벼농사 짓는 주민 104가구, 300여 명동네 안 나무에는 감, 사과, 대추 달려임진왜란 사충신 김득기 모신 ‘영모재’지금은 쇠락해 아무도 위치조차 몰라샘 마르지 않던 우물 덕 피란민 구제도비 오면 화포천 넘쳐 물난리 피해 입어"동네 사람들이 모두 물을 떠다 마시고 빨래를 해도 공동우물에는 늘 물이 풍족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물봉산·평락골 발원한 못에서 이름 유래‘못에 달빛 비쳐야 부락 편안하다' 생각박해수 씨 개발 덕분에 하우스재배 시작3월엔 서울 상인들 토마토 챙기느라 북적산업화 물결 탓 전답 28만㎡ 공업지 전락소득 향상 도움됐지만 마을은 되려 낙후"이번 정류장은 지내동 입구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못안마을입니다."부산에서 버
건물 한 채 없는 드넓은 평야 ‘녹색 향연’2010년 구멍가게 개·보수해 회관 단장집마다 작은 샘 깊이 파서 식수로 사용공동우물에 술 넣어 냉장고 역할 ‘톡톡’당산나무, 산 꼭대기서 외로이 자리 지켜과거 벼·토마토 재배하던 농가 즐비최근 돼지농장 들어오며 오·폐수 흘러와비행기
팔판산 기슭 위치한 그릇 굽던 가마터 지금도 땅 깊숙이 파면 조각들 발견돼 남양홍씨, 경주김씨 등 다양한 성씨 살아 물 많고 터 좋은 덕분 부자 된 사람 넘쳐나‘판서 8명 나는 명당’ 유명세 고시생 몰려 1960년대 북한 피난민 호랑이 잡아오기도 정월대보름엔 걸궁패 꾸려 풍물놀이 즐겨"신안마을은 팔판산 기슭에 자리한 산 좋고
일제강점기 때 웃들, 아랫들로 나뉘어주민들 노력 인정받아 장수마을로 선정수령 200년 나무에 해마다 당산제 지내3년 전 집터 아래서 연자방아 발견해 전시행방 모르던 고인돌, 공장에서 모셔 제사난개발 맞서 공동체 유지하는 노력 진행“출향인과 주민들 힘 모아 지켜나갈 것”자동차 타이어가 굴러가는 곳마다 공장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줄지어 가
조선시대 정자에서 마을 이름 유래상·하북 합친 이북면, “북한 연상” 이유 개칭경전선 간이역 생긴 이후 재래시장 번성승객 넘쳐나 등교 때는 매달려 가다시피육로 발전 탓 사라져 이제 건물 한 동만2002년 월드컵 때 대형 홍수로 큰 피해산 깎아 아파트 건립 소식 난개발 걱정북부동을 지나 한림면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순식간에
봉하산·낙동강 사이에 200년 전 자연부락갈대 많아 ‘새밭’에서 ‘새로운 밭’으로 개명객지에서 이주 이어져 90가구 ‘오손도손’명절마다 연극·노래자랑, 언제나 웃음꽃들녘 제방 축조 전에는 물난리 끊이지 않아진영오일장 가던 ‘도둑놈산’ 도적떼 설쳐주
임진왜란 때 피란 왔던 조갑환 정착농업·축산업 종사 주민 80여 명 거주초록 물든 장엄산 병풍처럼 감싼 지형재실 ‘치사재’서 음력 10월 보름 때 묘사안곡리 삼층석탑, 고려시대 절 추정콜레라 막은 나무 앞서 정월대보름 당산제수 년 사이 공장 몰려와 마을 모습 악화"꼬끼오~!" 한림면 안곡리 안곡마을에 들어
는 2011~2014년 100회에 걸쳐 '김해의 뿌리-자연마을을 찾아서' 기획연재를 게재했다. 첫 연재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후에도 흙과 나무,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었던 자연마을에는 여전히 시멘트가 부어지고 생명은 뿌리째 뽑혀나가고 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김해의 원형질과도 같은 자연마을 시리즈를
"인구 50만 명을 넘어선 김해의 발전 속도는 눈이 부시다. 역동적인 김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도시화 이전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자연마을'에 닿아 있다. 수백 수십 년에 걸쳐 시간의 퇴적물로 생겨난 자연마을들은 김해의 원형질과 같다."가 지난 2011년 11월 23일 '김해의 뿌리-자
3년 가까운 시간 기자 6명 바통 취재기록과 단순 향수 자극 뛰어넘어선 성과행정 차원 후속 작업 서둘러야 할 때2011년 11월 진례의 상촌마을에서 시작했던 의 기획연재가 2014년 9월 생림의 봉하마을을 끝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약 3년 동안 6명의 기자들이 바통을 주고받으며 100개나 되는 김해의 자연마을
출신 마을 취재 부탁 독자기고 여러번지역발전 데이터베이스 활용 목소리도"'자연마을' 시리즈는 김해사람으로서 잊고 있었던 김해의 뿌리를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자연마을 시리즈는 그동안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 출향인들은 특히 관심을 많이 보였다. 취재과정에서는 마을 이장이 타지에 나가 살고 있는 마을 출신 어르신들을
봉수대 있던 '봉화산 아랫마을'에서 유래 6·25전쟁 이후 사람들 하나둘씩 정착화포천 늪지대 농지 개간해 벼농사 시작마을 앞 60만㎡ 들녘 친환경농법 농사정월대보름엔 달집 태우기로 주민 화합
2대 걸친 4명의 효자 기린 '2세4효비'임진왜란 4충신 류식의 조부 류용 장군사헌부 감찰·비변랑 지낸 조강 등 유명마을회관 자리는 30년 전까지 곡식창고외동의 빽빽한 아파트 숲을 지나 5분 간 지방도로를 달리다보면 주촌교차로가 나타난다. 주촌교차로에서 주동초등학교 방향으로 향하면 주촌면 원지리 국계마을이 나온다. 국계마을로 가는 길 양편에
양지 터전에 살기 좋아 옛 부자 동네효자 마을로 소문 자자하고 인물 많아박영식 전 교육부장관도 마을 출신어버이날은 명절보다 소중해 큰 잔치조선 말기 고종 때 김해의 한 마을에 부모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형제가 있었다. 박시형, 박만형 형제였다. 그들은 어머니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은 뒤 피를 어머니가 마시게 해 소생시켰다. 이들은 어머니가 숨을 거
화포천 범람으로 여름이면 침수 피해고기 숨는 명당 이야기에서 이름 유래마실 물 귀해 공동우물은 매일 장사진100년 된 포구나무 당산제는 명맥 끊겨"메거지(메기의 김해 사투리)가 입으로 물을 내놓기만 해도 홍수가 났던 마을입니다."한림면 사람들은 안하리 어은(漁隱)마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근 화포천의 범람으로 워낙 침수가 잦았던 마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