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은 경상북도 예천군이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다. 그러다보니 원래의 고향인 예천군보다는 부산이 훨씬 익숙하다. 그러나 뿌리를 이야기하라면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은 예천군은 물론이요, 조상께서 터를 잡으셨던 영월까지도 반드시 언급하게 된다. 필자는 1996년, 부산의 풍광과 역사 유적을 노래한 한시를 문집에서 골라내 이를 해석하고, 부
연자루는 고려시대의 주열(朱悅·?~1287)이 시로 읊은 이래 정몽주(鄭夢周·1337~1392), 권근(權近·1352~1409), 조준(趙浚·1346~1405) 등 고려조 시인들이 이를 이었다. 이제는 조선조 초기 시인 이원(李原·1368~1430)의 시를 보자. 앵무주 가에 방초는 푸르고 등왕
이 이야기를 믿자면 연자루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 이전부터 있다가 구형왕 9년에 한 번 사라졌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분명한 문헌이나 실제의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것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김해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보니 가락국과 관련시켜 이러한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져온 것으로 보인다. 연자루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허정 문 앞이며 객관의 후원이라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와 를 새롭게 번역하고 연구한 안미정 선생은 청뢰각(晴 閣)에 대해 '지금의 김해시 동상동에 있었다'고 하고, 의 내용을 통해 '객관 중문(中門) 밖에 있었으며 기축(己丑·1649)에 부사 이상경(李尙敬·1609~
이제는 김해의 가장 중심이었던 김해읍성 안으로 간다. 처음 만날 곳은 김해 행정의 중심으로서 부사가 고을의 일을 처리하던 김해부 동헌(東軒)이다. 동헌은 김해읍성의 서문에 가까운 지금의 서상동(西上洞)에 있었다. 지금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다음은 조선조 전기 시인 홍성민(洪聖民·1536~1594)의 것이다. 산빛은 예로부터
고려 장군 박위가 왜적 방어용 산성 수축조선시대 김해부사 정현석이 개축둘레 1560척에 성안 마르지 않는 우물 둘봉수대인 만장대 해발 323m에 위치김해평야와 낙동강·동래·양산까지 조망해질녘 누각서 바라본 김해는 천하요새정몽주 '김해산성기'·허훈 시 여덟 수 전해과 등
에 진례성(進禮城)에 대한 소개는 '서쪽 35리다' 밖에는 없다. 오히려 이학규(李學逵·1770~1835)가 시의 주에 적어 놓은 '진례성은 김해부 서쪽 3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가 그의 아들 하나를 진례성주로 삼고 왕궁(王宮)과 태자단(太子壇)과 첨성대(瞻星臺)를 세웠는데,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거
(28)활천(活川) 해반천(海畔川) 덕교(德橋) 첨성대(瞻星臺) 자암(子菴)
에 '호계(虎溪)는 부성(府城) 가운데에 있다. 물의 근원이 분산(盆山)에서 나오며, 남쪽으로 강창포(江倉浦)로 들어간다'고 하고, 강창포는 부의 남쪽 6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1984년 이후 복개가 되어 예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는 없으나, 여전히 부원동을 관통해 지나며 김해의 오랜 핏줄로 흐르고 있다. 정조 14년(1
도요저(都要渚)는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伽倻津) 나루 사이인 낙동강 하구를 왕래하던 나루터다. 삼랑진의 세 물줄기 아래쪽에 형성된 모래톱으로 바로 건너편이 삼랑진이다. 현재의 행정명은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다. 에는 김해의 도요저는 본래 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장유사(長遊寺)는 김해시와 창원시의 경계인 불모산(佛母山) 또는 장유산(長遊山)에 있다. 계곡 이름마저 '장유'로 불리는 골짜기를 따라 오르다보면 맑은 냇물을 만나게 되는데, 여름이면 녹음의 서늘한 기운을, 가을이면 단풍의 붉은 기운을 골골이 녹이며 흐르고 있다. 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걷다가 숨이 가빠 두 번째 쉴 때 쯤, 여기로부터 기운을 이끌어간 산
에는 이전에 보았던 귀암사(龜巖寺·영구암)·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 寺)와 함께 이세사(離世寺)가 신어산에 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이 없어 이 절에 대해서 더 언급하기는 어려우나 다행히 여기에서 읊은 시가 한 수 있으니, 그래도 위안이 된다. 다음 시는 고려 시대의 곽여(郭與:1058~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