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일 창간호부터 2년을 계속해 온 김해순례의 발걸음이 드디어 오늘 마침표를 찍는다. 시간에 쫓기던 자료찾기와 마을답사, 글짓기와 분량조절에 손톱을 깨물며 머리를 싸맸던 길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시내 9개동과 시외 1읍 7개 면의 역사와 사연 모두를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더라도 시내의 중심 '분산'에서 시작했던 발걸음
고려~조선시대에는 김해에서 양산으로 가는 길을 황산도(黃山道)라 했다. 김해부의 남역(南驛, 김해시 삼정동)을 나서, 덕산역(德山驛, 대동면 덕산리)을 지나고, 월당나루(대동면 월산리)에서 낙동강을 건너, 양산군의 황산역(黃山驛, 양산시 물금리)까지 가는 길이라 황산도라 했다. 그러나 는 이미 가야와 신라가 군사적으로 충돌하던 전장을
지난 두 차례의 상동순례에서 돌아보지 못한 마을이 있다. 서쪽의 우계리와 남쪽의 묵방리다. 먼저 이 마을들을 돌아본 후에 김해 순례의 마지막 발걸음이 될 대동면을 찾아보려 한다. 상동면소재지에서 대포천을 따라 오르며 시내 좌우에 늘어서 있는 우계, 소락, 광재의 3개 마을이 우계리다. 소락교 서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소락2교(2002.6)로 대포천을
이른 아침 KTX로 서울을 가다 보니 지난번에 한탄만 거듭했던 감로사 터가 낙동강 너머로 따스하게 보였다. 아침 햇살 가득한 배산임수의 작은 마을이 그렇게 예쁘고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고려·조선시대의 명찰 감로사가 자리했던 이유가 새삼스러워지면서도, 절 대신에 가득 들어찬 공장들을 보며 "우리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김해 동쪽의 윗동네라 상동(上東)이라 했다. 지난 8월 현재 1천666 가구, 3천661명(남 1천981)의 주민 수는 김해에서 가장 적은 것이지만, 무척산 남쪽에서 신어산 북쪽에 걸쳐 있는 70.58㎢의 면적은 김해에서 가장 넓다. 그만큼 인구가 희박하다는 얘기인데, 입주공장은 무려 910여 개에 이르고 있다. 1개 공장에 최소한 10명의 근로자만 셈하더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이작들판이 아름답고, 들판의 북쪽 가장자리를 휘감아 도는 낙동강은 모처럼의 볼륨을 자랑한다. 김해 생림과 밀양 삼랑진 사이의 낙동강에는 5개나 되는 각양각색의 다리들이 걸쳐 있다. 생림 북부의 마사리, 안양리, 도요리를 돌아보는 생림순례의 마지막 발걸음은 낙동강에 얽힌 사연과 다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될 모양이다. 지난번에 걸음을
코발트블루의 가을 하늘과 순백의 면사무소가 이루는 콘트라스트가 눈부시다. 초록의 정원수들과 어울려 나래 펴는 학 모양 사무소 양쪽에 말끔한 보건지소와 복지회관이 있다. 일 보는 주민이 적어선지 너른 주차장의 시원한 공간이 방학 중의 학교 같은 분위기다. 맞은편에 일렬횡대로 늘어선 5기의 비석들은 고장의 전설을 얘기한다. 흔한 지방수령들의 송덕비이지만 맨 왼
'生林洞天'(생림동천). 생림면으로 들어가는 입구마다의 마을 표지석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앞의 '생림'은 쉽게 읽히지만, 뒤의 '동천'을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은 드물다. 뜻 또한 얼른 새겨지지 않는다. 옛 삼랑진교에서 들어오는 북쪽의 표지석(1993.9.25)에는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생림'이란 설명문이 붙어 있다. 날 생(
지난번에 숙제로 남겼던 대눌과 소눌 선생의 이야기로 오늘의 발걸음을 시작하려 한다. 지금 한림면의 금곡마을에 형제학자로 이름을 남겼던 두 분이 사셨다. 금곡리의 근본 되는 마을이라 '본금곡'이라고도 했다. 북은 낙동강, 동은 작약산, 서는 화포천에 막혀 남쪽의 좁은 길만이 겨우 트여 있을 뿐이다. 세상의 기(氣)가 다 모일 것 같은 마을에서 학문과 지조
한림면 면소재지 한림정으로 가는 길은 낙동강에 막힌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쪽의 세 갈래 길이 있다. 남쪽 김해대로의 명동삼거리에서 한림로를 따라 화포교를 건너가는 길, 서쪽 진영 본산의 봉하마을에서 봉화산 아래 봉하로와 한림로343번길로 화포천을 따라 가는 길, 동쪽 생림면에서 장재로를 따라 장재교에서 화포천을 건너가는 길 등이
한림면의 이름은 참 개성적이다. 대부분의 지명이나 행정구역명이 마을의 지리적 특징이나 좋은 뜻글자에 매달렸던 데 반해, 이 고장 출신인물 김계희(金係熙) 공의 관직명이었던 한림학사에서 마을이름의 유래를 구했던 것은 좀 유별나다. 신라 경덕왕 때부터 유행했던 중국지명의 채용과 변용이 좋은 글자 뜻에 기초해 보편적인 공(公)으로 여겨지던 전통 속에서 사(私)로
지난 번 걸음에서 빠뜨린 데가 있다. 잊어서도 아니고 서둘러서도 아니다. 불친절한(?) 과거의 기록을 따라 현재의 땅 위에서 헤맸던 탐사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능묘 조에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뒤에 등재되었고,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던 담헌(淡軒) 김극검(金克儉)의 묘를 찾았다. 묘를 관리해 오던 담헌공파 집안 분들께선 &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