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추석 명절을 쇠러 고향에 갔다. 추석 전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태풍이 몰아닥쳤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다 그 이름을 기억하실 것이다. 바로 사라호 태풍이었다. 그해는 내 생애 가장 슬픈 추석이었다. 사라호는 우리나라 기상 관측 사상 최대의 피해를 냈다. 924명이 죽거나 실종됐고 이재민은 98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태풍이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녹산 수문이 있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부산 강서구로 돼 있지만 예전에 녹산은 김해 땅이었다. 녹산 수문은 만조 때 바닷물이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막고, 홍수 때는 강물의 수위를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해 명지국민학교에 다닐 때 큰 홍수가 나 집이 물에 잠겼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녹산 수문을 열 수가 없었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 어린 목동이 배불리 풀을 먹은 소를 집으로 몰고 가기 위해 소말뚝을 뽑고 있다. 이 장면은 여러 방향과 구도를 생각하며 신중하게 찍은 사진이다. 당시에는 고가의 흑백필름으로 촬영하다 보니 여러 장을 찍기 힘들었다. 그래서 촬영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진의 제목은 '목동'이다. 내 사진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
옛날 낙동강 인근에서 안동, 풍산, 수산, 삼랑진, 구포, 하단 등에 선착장이 번창했다. 6·25 전쟁 때는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큰 역할을 했다. 비옥한 김해 삼각주 평야는 곡창지대로 유명하다. 구포다리 부근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 어족이 풍부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진 속의 배는 주낙(긴 낚
지난 1955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앞집에 살던 친구의 동생이 물수제비를 하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강가에 가서 돌을 집어 강물 위로 던져 누구 돌이 오래 튀기는지 겨루기도 했죠. 에 사진을 연재하면서 김해에 대한 향수가 솟아나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마전 오랜만에 김해에 내려가 물수제비 사진을
외가댁이 있던 '명호(명지의 옛 이름) 마을'은 사방이 공동묘지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올록볼록한 파도 속에 떠있는 조그마한 섬 같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모래 성분이 많은 토질이라 공동묘지를 가로지르는 길가의 봉분은 일부가 허물어져 혼자 외가댁을 찾아갈 때는 좀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키 큰 버드나무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커다란 포구나무에서 매미
여름이면 동네 친구들과 낙동강에서 벌거벗고 물장난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물싸움을 하면서 물을 먹이기도 했죠. 물 속으로 잠수해 몰래 친구 다리를 잡고 넘어뜨리기도 했답니다. 누가 물 속에 더 오래 있나 경쟁을 하고, 잡기 놀이도 하고, 잠수해 멀리 가기도 했죠. 물놀이에 지치면 물가에 나와 찰흙으로 댐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물을 가득 담아 놓고
는 이번 호부터 사진작가 강일웅(75) 씨의 옛 김해 사진을 '사진으로 보는 옛 김해'라는 제목으로 연재합니다. 강 씨는 외가인 김해군 명지면 순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58년 제1회 경남사진전 대상, 1961년 프랑스 낭트 국제사진공모전 입선 등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1960년대 말쯤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일군의 행정·경찰공무원들이 콜레라의 전염과 확산을 막기 위해 설치된 '김해군 코레라 제1검역소'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완장을 차고 가볍게 짝다리를 한 모습에서 의기양양함이 느껴진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철에는 법정전염병 제1군에 속하는 콜레라가 사람들을 괴롭혔다. 예방주사와 방역 사업
30년 전만 해도 김해 흥동 임호산 아래에 자그마한 규모의 화장막(화장터)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곳을 스쳐 지나면서 산 중의 무덤과는 좀 다른 질감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화장이 보편화 하지 않았던 터라, 시설도 그리 좋지 않았고, 무던한 공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김해에는 현재 김해시 주촌면 덕암리 산137에 추모의공원이란 이
김해의 도심을 관통하며 흐르는 해반천은 60~70년대만 해도 비가 많이 오면 범람하기 일쑤였다. 사진은 60년대 말께 비가 많이 와 해반천 일대가 훼손된 모습이다. 위치는 현 국립김해박물관 앞. 당시만 해도 해반천에서는 민물고기와 민물담치 같은 게 꽤 많이 잡혔다. 아이들은 신나게 멱을 감았고. 그러나 생활오폐수 등을 방치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수질이 3급수
때 이른 장마가 시작됐다. 김해는 20, 30년 전만해도 배수 시설이 미흡해 비가 많이 오면 도로가 침수되는 일이 잦았다. 70년대 번화가 중 하나였던 서상동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짐을 실은 트럭과 자전거가 물에 잠긴 도로 위를 뒤뚱뒤뚱 지나가고 있고, 한 무리의 주민들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침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바지와 신발이
70년대 초 동상동 시절의 김해문화원이다. 아담한 단층 건물이었다. 김해문화원이 처음 문을 연 게 1956년 9월이니, 어느덧 반세기를 넘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 생각이 원만해 진다는 이순의 나이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해문화원의 현실은 정반대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전투구에다 악질적인 소송전이 난무하는 탓에 '미개원'이란
지난주에는 오래 전 한 중학교 남학생들이 리어카로 학교까지 흙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신문에 소개했다.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신설 학교의 학생들이 재학 중인 학교의 담장 등을 구축하기 위해 울력을 하는 사진이었다. 사진을 본 20대 독자가 "(학생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다니)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의아해 했다. 그때는, 그랬다
김해지역의 한 중학교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리어카에 흙을 실어 나르고 있다. 목적지는 학교였다. 1960, 70년대만 해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校舍:학교 건물)가 부족했고 물자와 재정도 넉넉지 않았다. 그 때문에 특히 담장이나 운동장 등 일부 시설이 채 갖추어지지 않은 신설 학교의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은, 개천의 돌을 주워 나르는 등의 울력에 동원되는
1970년대 초쯤일까? 김해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민방공 훈련(民防空訓練)이 진행되고 있다. 민방공 훈련을 사전에서는 '적의 공습 때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방어 훈련'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당시에는 매월 15일마다 3분 파상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고, 그러면 학생들은 눈을 감고 귀를 막아야 했다. 정부의 방침에
1960년대 말의 어느 봄날, 김해평야의 한 구석자리에서 밀짚모자를 쓴 농부들이 양수기를 이용해 열심히 논물대기를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 농부는 흥건히 물이 들어찬 논에서 소를 데리고 무논갈이를 하고 있다. 건너편 논에서는 일군의 남녀가 모를 심고 있다. 가뭄에 물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진이라, 정경이 따뜻하고 편안하다.알림 :
진례면 산본리 용전부락(마을) 초입에서 바라본 1972년 어느 날의 풍경이다. 새마을운동 당시에는 시골집 지붕 개량도 주요 목표였는데, 새마을운동이 갓 시작된 시점이라 그런지 초가지붕을 인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초입의 어수선한 길과 자그마한 밭들이 나그네에게는 운치와 정감을 제공하겠지만, 정작 주민들은 사느라 힘들어 했을 테지. 이 마을은 지금도
1977년 어느 날, 지금은 '수릉원'으로 예쁘게 단장된 봉황동 김해공설운동장에서 '김해군 민방위대시범경연대회'가 열렸다. 본부석 양 옆으로 '민방위 참여하여 유비무환 실천하자' '조국 지킨 의병정신 민방위로 이어받자'는 내용의 표어가 보인다. '반공 방첩'이란 구호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한 아이(이원규 시인)는 아버지가
1960년대 김해 들판에서 한 농부가 경운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농부 뒤로 중절모를 쓴 한 신사가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논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혹시, 지주? 경운기와 트랙터가 보편화하기 시작한 게 70년대이니 이때쯤이라면 경운기는 대단한 물건이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경운기 경진대회'란 것도 열렸다. 지금 같으면 '이색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