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 남서쪽 인근서 성벽 일부 발견왕궁 둘러싼 흙으로 만든 토성이라'봉황토성'이라 이름짓고 안내간판 세워중앙기원~오거리~옛 봉황초등 잇는 길봉황토성 뿌리 고스란히 잠들어 있어봉황대를 내려오다 뒤를 돌아보니 눈부신 벚꽃이 푸른 하늘에 가득하다. 하얗게 흩날리는 꽃잎이 봄날의 전성을 뽐내며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 여기는 가야의 첫 임금으로 가야
김해도서관을 나와 내외동 쪽으로 조금 가다 봉황교 앞 횡단보도에서 분성로를 건너면 봉황대유적공원이다. 유적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세 군데 정도가 있지만, 이 부근이 가야의 거리와 유적공원으로 정비된 이래 이쪽의 이용이 부쩍 늘었다. 김해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대형주차장과 한국의 아름다운 화장실로 선정된 해우소가 있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예전에는 수로왕릉
"보게 되면 존중하게 되고, 보지 못하면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김해를 걷다 보니 자랑스러운 것은 물론 사소한 것까지도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보이니까 소중하게 느껴지면서 존중하는 마음까지 절로 생겨난다. '김해사랑'에 특별한 계기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리라. 우리 주변에 대한 관심이면 저절로 시작될 수 있다. 살피며 궁금해 하고,
오늘은 얼마나 걸어 볼 수 있을까? 길어졌던 합성초등학교와 수로왕릉에서의 수다 덕분에 지난 호에 계획했던 발걸음의 대부분이 오늘의 몫으로 돌아 왔다. 수로왕릉 앞을 출발해, 시관광안내사도 만나고, 김해한옥체험관을 지나, 김해민속박물관을 둘러 본 뒤, 수릉원 입구의 허왕후 동상과 큰 차나무 장군수(將軍樹)를 음미하고, 대성동고분군에 오를 작정이지만, 그 사이
수로왕릉을 중심으로 돌아보는 오늘의 발걸음은 일종의 역사문화유적답사 같은 일정이 되겠지만, 지난번에 지면이 다해 '억지로'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곳이 있다. 지난 호의 종착점이었던 김해교회와 옆구리를 맞대고 있는 김해합성초등학교다. 김해합성초등학교를 김해교회와 함께 둘러봐야 하는 이유는 같이 붙어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1907년 김해교회의 배성두 장로가
동상시장 북쪽 아케이드 출구 나오면연화사 대웅전 기와지붕 단아하고금릉팔경 '함허정 이슬 연잎' 아련시장골목 한켠 방치된 '유공정비' 옹색서쪽으로 발길 돌려 걷다 보면복원된 김해읍성 북문 한눈 가득북문 지나 가락로 나서면 길 건너편엔117년 된 '약방예배당' 김해교회 반겨 일제 강점기에 계룡산인(鷄龍山人) 이동은(李東隱) 선사가 함허정 터에 '김
김해읍성 동문 밖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 동상동(東上洞)이라 했는가 보다. 어제 오늘 우리가 걷고 있는 동상동이란 이름도 도로명으로 부여되는 새 주소명 때문에 점차 사라져 갈 운명이다. 우리 동네 이름에 얽히고, 이름으로 남았던 지난날의 수많은 사연들도 점차 잊혀져 갈 것이다. 좀 더 시시콜콜한 사연까지도 이야기하고 남겨야겠다는 사명감마저 든다.지난번에는
담장 허문 김해여중 재잘대는 목소리 정겹고홍살문 높이 솟은 향교선비 글읽는 소리 들려오는 듯김해건설공고의 매화로(梅花路)를 나서서 구지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김해여중 앞을 지난다. 몇 년 전에 헐어 낸 담장 덕분에 시원하게 펼쳐진 운동장과 교사가 개방적이다. 거리의 소음이 조금 더 커지고, 교실서 공부하는 학생들 시선이 다소 산만해졌을 수도 있겠으나, 열린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가야의 거리'로 나선다. 박물관에서 봉황대까지 해반천을 따라 난 2.1㎞의 쾌적하고 예쁘장한 길이다. 김해시가 1996년 12월부터 2005년 7월까지 3단계에 걸쳐 8년 반 동안이나 만들어 온 길로, 2007년에는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들었다.봉황대유적(3단계)~대성동고분군(2단계)~구지봉(1단
우리 김해는 전국에서 11개뿐인 지역 국립박물관 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광역지자체를 제외하고 전국 시·군 중 4위의 경제력과 50만 주민의 제법 큰 도시가 되었지만, 1991년 건립계획 당시는 물론 1998년 7월 29일 개관 때까지도 시의 규모로만 본다면 국립박물관이란 문화적 혜택을 누릴만한 위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신라의 국립경
김해의 첫 하늘은 구지봉에서 열렸다. 새 나라 세우려는 수로왕의 목소리가 처음 들렸던 곳이 구지봉의 하늘이었고, 붉은 줄에 달린 금색 상자 속 여섯 황금 알 중 가장 큰 모습으로 첫발을 디뎠던 곳도 구지봉이었다. 수로왕의 탄강을 빌고 수로왕을 맞이하던 구간(九干), 그러니까 아홉 촌장과 그들의 인민이 이미 있었기에 수로왕이 김해에 살았던 첫 사람은 아니었다
1997년 복원 봉수대 오르면눈 아래로 낙동강·남해바다옛날 바다였던 평야·시가지파노라마 같이 펼쳐져 보여김해시 승격 당시만 해도 10만이 채 안됐던 김해 인구가 어느덧 50만을 넘어섰다. '토박이' 김해 사람들과 들어 온 사람들이 '김해'라는 용광로 안에서 서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공동체 의식이 희박하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김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장을 마련했다. 김해의 땅 덩어리와 거기에 얽힌 역사적 사연,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