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지금의 가락로 분성사거리 조금 못 미친 곳에 김해의 대표적 서점 가운데 하나였던 교학사와 송세광 외과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낡은 급행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살색 바탕에 붉은색 띠를 두른 급행 시외버스들은 이곳에서 다리쉼을 하면서 때로는 기름을 넣은 뒤 부산, 울산, 마산으로 직행했다. 급행 시외버스들은 완행버스들 보다 왠지 고급스러워 보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960년대, 한림면 장방리 화포천 연변 허름한 초막골의 모습이다. 초막골은 초막집이 많은 마을이란 뜻이다. 초막집은 억새와 갈대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는데,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과는 재료 면에서 성격이 다른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피란 온 사람들이 이런 집을 지어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김해에서는 이 초막집을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구호의 시대였다. 반공방첩, 근면·자조·협동…. 이 시기에 정부 주도로 새마을운동이 일어났다. 생활태도혁신·환경개선·소득증대를 통해 농촌을 근대화시킨다는 게 목표였다. 이때 등장한 구호 가운데 하나가 '퇴비증산'이다. 퇴비는 두엄이라고도 하는데, 잡초, 낙엽, 짚
지금은 부산 강서구 죽림동 787 일원으로 편입된 김해의 옛 땅 죽도 가락산의 '가락 죽도 왜성'.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쌓은 돌성이다. 1999년 3월 9일 부산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됐다. 죽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다른 말로 죽도성이라고도 한다. 성 면적이 약 3만㎡에 달하는데, 축성 시 왜군은 점령지인 인근 조선 백성들을 강
80년대의 어느 날 서상동 '송세광 욋과의원' 부근 시외버스 터미널 앞 가락로 일대의 풍경이다. 부산에서 김해와 마산, 고성을 거쳐 충무(현 통영시)로 가던 시외버스와 시내버스 두 대가 중앙선 표시도 없는 허술한 2차로를 교행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는 교통사고도 제법 일어났다. 한 시인의 시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김해시 서상동 송세광
가락로의 분성사거리를 지나 구지봉 쪽으로 난 송한의원 앞 도로 변의 1981년 여름풍경이다. '김해 축구조기회'가 '경축! 김해시 승격-1981년 7월 1일'이란 내용의 플래카드를 전신주에 묶어놓았다. 플래카드 아래로 시골스런 시외버스 정류장에 소박한 완행 시외버스 두 대가 정차해 있는 게 보인다. 소박하다지만 명색 정류장이어서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
1983년 2월 5일 김해시청 청사 기공식이 열렸다.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한 것이 1981년 7월 1일이니, 당시만 해도 김해는 시·군으로 분리돼 있었다. 통합 김해시가 출범한 것은 1995년 5월 10일이다. 이때부터 김해는 '도농복합형' 도시로 불렸다. 청사 기공식은 '가락의 긍지로 뻗어가는 김해시' '화합과 긍지로 낙도(樂道)
1974년, 용두산에서 내려다 본 장유면 무계리 광석부락의 모습이다. 당시에는 이곳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하천은 대청천인데, 장유중학교의 교가에는 '대청천 맑은 돌로 쌓아 올렸다'는 표현이 있다. 당시 장유중 학생들은 비료 부대에 대청천의 돌을 담아 등교했고, 이 돌들은 학교를 구축하는 데 쓰였다. 대청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이름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안동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아니, 차라리 산촌(山村)이라고 불러야 옳았다. 그러던 차에 계단식 천수답이 있던 들판에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들어섰다. 1968년이었다. 그 뒤, 한일합섬 주위로 한영요업, 한국 스핀돌 등이 입주하면서 이 일대가 공단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김해의 성장 동력'안동공단'의 시작이었다. 공단이 조성되
김해에서 '활천 고개'만큼 '상전벽해'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이 흑백사진은 현 동상동 제일교회 사거리에 해당하는 70년대 활천 고개 초입의 풍경이다. 김해 시내와 활천동을 오가기 위해서는 누구든 이 활천고개를 이용해야 했다. 김해고등학교와 김해여자고등학교를 통학하던 학생들도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이 활천 고개를 넘었다. 복개되기 전
1960년, 김해에서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큰 농업인' 박해수(1926~1985) 씨가 우리나라 최초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작물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때부터 겨울에도 참외와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박 씨에게 '5·16 민족상' 산업부문 본상을 수여하고, 두 차례에 걸쳐 김해를
한국영화사의 전성기라는 1960년대, 영화는 대중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시골을 돌며 영화를 틀어주는 업자들도 있었고, 간혹 반공영화를 공짜로 보여주기도 했다. 김해에도 극장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다 같이 학교 운동장이나 타작마당 같은 곳에 모여서 이런 영화들을 봤다. 스크린을 대신해 드리운 흰 천 앞에 모여든 사람들 뒤에서는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
지금은 내동 연지공원 내 연지호수로 축소 변경된 80년대 '신못(新池)'의 고즈넉한 모습이다. 당시의 신못은 8만 9천여㎡(2만 7천여 평)의 크기를 자랑하던 광대한 저수지였다.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올라왔고, 뒤쪽으로 늪이 있었는데, 일제시대(1930년대) 때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저수지로 만들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이 곳에 연꽃이 많이 피었다
임호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70년대 초의 김해 시가지 전경이다. 이때만 해도 김해의 인구는 불과 수 만을 헤아렸는데, 지금은 무려 51만이다. 발 아래 내외동은 날것의 논밭 그대로이고, 해반천 너머로 지금은 전하동으로 이전한 봉황국민학교(현 초등학교)와 '당산'이라 불렸던 봉황대가 보인다. 시가지 뒤편으로 아파트와 산복도로가 들어서기 전의 만장대(분산)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로 추정되는 현 가락로 분성사거리 일대의 풍경. 지프차 한 대가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구지봉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왼쪽으로 김해경찰서 정문이 보인다.알림 : 새해부터 옛 김해의 사진을 싣습니다. 특히 김해 토박이들께서는 아련한 옛 추억에 젖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