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의 어느 봄날, 김해평야의 한 구석자리에서 밀짚모자를 쓴 농부들이 양수기를 이용해 열심히 논물대기를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 농부는 흥건히 물이 들어찬 논에서 소를 데리고 무논갈이를 하고 있다. 건너편 논에서는 일군의 남녀가 모를 심고 있다. 가뭄에 물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진이라, 정경이 따뜻하고 편안하다.알림 :
진례면 산본리 용전부락(마을) 초입에서 바라본 1972년 어느 날의 풍경이다. 새마을운동 당시에는 시골집 지붕 개량도 주요 목표였는데, 새마을운동이 갓 시작된 시점이라 그런지 초가지붕을 인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초입의 어수선한 길과 자그마한 밭들이 나그네에게는 운치와 정감을 제공하겠지만, 정작 주민들은 사느라 힘들어 했을 테지. 이 마을은 지금도
1977년 어느 날, 지금은 '수릉원'으로 예쁘게 단장된 봉황동 김해공설운동장에서 '김해군 민방위대시범경연대회'가 열렸다. 본부석 양 옆으로 '민방위 참여하여 유비무환 실천하자' '조국 지킨 의병정신 민방위로 이어받자'는 내용의 표어가 보인다. '반공 방첩'이란 구호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한 아이(이원규 시인)는 아버지가
1960년대 김해 들판에서 한 농부가 경운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농부 뒤로 중절모를 쓴 한 신사가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논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혹시, 지주? 경운기와 트랙터가 보편화하기 시작한 게 70년대이니 이때쯤이라면 경운기는 대단한 물건이었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경운기 경진대회'란 것도 열렸다. 지금 같으면 '이색 대
80년대 초 지금의 가락로 분성사거리 조금 못 미친 곳에 김해의 대표적 서점 가운데 하나였던 교학사와 송세광 외과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낡은 급행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살색 바탕에 붉은색 띠를 두른 급행 시외버스들은 이곳에서 다리쉼을 하면서 때로는 기름을 넣은 뒤 부산, 울산, 마산으로 직행했다. 급행 시외버스들은 완행버스들 보다 왠지 고급스러워 보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960년대, 한림면 장방리 화포천 연변 허름한 초막골의 모습이다. 초막골은 초막집이 많은 마을이란 뜻이다. 초막집은 억새와 갈대로 지붕을 이은 집을 말하는데,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집과는 재료 면에서 성격이 다른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피란 온 사람들이 이런 집을 지어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김해에서는 이 초막집을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구호의 시대였다. 반공방첩, 근면·자조·협동…. 이 시기에 정부 주도로 새마을운동이 일어났다. 생활태도혁신·환경개선·소득증대를 통해 농촌을 근대화시킨다는 게 목표였다. 이때 등장한 구호 가운데 하나가 '퇴비증산'이다. 퇴비는 두엄이라고도 하는데, 잡초, 낙엽, 짚
지금은 부산 강서구 죽림동 787 일원으로 편입된 김해의 옛 땅 죽도 가락산의 '가락 죽도 왜성'.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쌓은 돌성이다. 1999년 3월 9일 부산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됐다. 죽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다른 말로 죽도성이라고도 한다. 성 면적이 약 3만㎡에 달하는데, 축성 시 왜군은 점령지인 인근 조선 백성들을 강
80년대의 어느 날 서상동 '송세광 욋과의원' 부근 시외버스 터미널 앞 가락로 일대의 풍경이다. 부산에서 김해와 마산, 고성을 거쳐 충무(현 통영시)로 가던 시외버스와 시내버스 두 대가 중앙선 표시도 없는 허술한 2차로를 교행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는 교통사고도 제법 일어났다. 한 시인의 시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김해시 서상동 송세광
가락로의 분성사거리를 지나 구지봉 쪽으로 난 송한의원 앞 도로 변의 1981년 여름풍경이다. '김해 축구조기회'가 '경축! 김해시 승격-1981년 7월 1일'이란 내용의 플래카드를 전신주에 묶어놓았다. 플래카드 아래로 시골스런 시외버스 정류장에 소박한 완행 시외버스 두 대가 정차해 있는 게 보인다. 소박하다지만 명색 정류장이어서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
1983년 2월 5일 김해시청 청사 기공식이 열렸다.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한 것이 1981년 7월 1일이니, 당시만 해도 김해는 시·군으로 분리돼 있었다. 통합 김해시가 출범한 것은 1995년 5월 10일이다. 이때부터 김해는 '도농복합형' 도시로 불렸다. 청사 기공식은 '가락의 긍지로 뻗어가는 김해시' '화합과 긍지로 낙도(樂道)
1974년, 용두산에서 내려다 본 장유면 무계리 광석부락의 모습이다. 당시에는 이곳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하천은 대청천인데, 장유중학교의 교가에는 '대청천 맑은 돌로 쌓아 올렸다'는 표현이 있다. 당시 장유중 학생들은 비료 부대에 대청천의 돌을 담아 등교했고, 이 돌들은 학교를 구축하는 데 쓰였다. 대청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