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안동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아니, 차라리 산촌(山村)이라고 불러야 옳았다. 그러던 차에 계단식 천수답이 있던 들판에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들어섰다. 1968년이었다. 그 뒤, 한일합섬 주위로 한영요업, 한국 스핀돌 등이 입주하면서 이 일대가 공단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김해의 성장 동력'안동공단'의 시작이었다. 공단이 조성되
김해에서 '활천 고개'만큼 '상전벽해'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 또 있을까. 이 흑백사진은 현 동상동 제일교회 사거리에 해당하는 70년대 활천 고개 초입의 풍경이다. 김해 시내와 활천동을 오가기 위해서는 누구든 이 활천고개를 이용해야 했다. 김해고등학교와 김해여자고등학교를 통학하던 학생들도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이 활천 고개를 넘었다. 복개되기 전
1960년, 김해에서 '농업 혁명'이 일어났다. '큰 농업인' 박해수(1926~1985) 씨가 우리나라 최초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작물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그때부터 겨울에도 참외와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박 씨에게 '5·16 민족상' 산업부문 본상을 수여하고, 두 차례에 걸쳐 김해를
한국영화사의 전성기라는 1960년대, 영화는 대중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시골을 돌며 영화를 틀어주는 업자들도 있었고, 간혹 반공영화를 공짜로 보여주기도 했다. 김해에도 극장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다 같이 학교 운동장이나 타작마당 같은 곳에 모여서 이런 영화들을 봤다. 스크린을 대신해 드리운 흰 천 앞에 모여든 사람들 뒤에서는 필름을 돌리는 영사기
지금은 내동 연지공원 내 연지호수로 축소 변경된 80년대 '신못(新池)'의 고즈넉한 모습이다. 당시의 신못은 8만 9천여㎡(2만 7천여 평)의 크기를 자랑하던 광대한 저수지였다.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올라왔고, 뒤쪽으로 늪이 있었는데, 일제시대(1930년대) 때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저수지로 만들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이 곳에 연꽃이 많이 피었다
임호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70년대 초의 김해 시가지 전경이다. 이때만 해도 김해의 인구는 불과 수 만을 헤아렸는데, 지금은 무려 51만이다. 발 아래 내외동은 날것의 논밭 그대로이고, 해반천 너머로 지금은 전하동으로 이전한 봉황국민학교(현 초등학교)와 '당산'이라 불렸던 봉황대가 보인다. 시가지 뒤편으로 아파트와 산복도로가 들어서기 전의 만장대(분산)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로 추정되는 현 가락로 분성사거리 일대의 풍경. 지프차 한 대가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구지봉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 왼쪽으로 김해경찰서 정문이 보인다.알림 : 새해부터 옛 김해의 사진을 싣습니다. 특히 김해 토박이들께서는 아련한 옛 추억에 젖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