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학자 정치적 활용 목적 첫 발굴 시작중심연대 5~6세기 전반으로 추정금동관·금·은장신구 등 다량 출토송현동서 발견된 ‘가야 소녀의 흔적’슬픈 ‘순장의 역사’ 앞에 선 듯 먹먹 경남 창녕은 영남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창녕 지역에 있던 가야국을 일러 비화가야(非火伽耶), 비사벌이라고 부른다. 비화가야는 가야연맹체(변한)의 하나로 6세기에 접어들어서 신라의 영토가 됐다. 햇살 좋은 가을날, 비화가야를 찾아 창녕으로 떠났다. 비화가야의 역사를 담은 이미희의 소설
⑤ 고성 송학동 고분군 고차국 때 중국~일본무역 기착점 역할금관가야에 눌려 해상로·내륙로 모두 빼앗겨포상팔국 전쟁서 패해 100년 동안 정체광개토대왕 남정 덕분 해상강국 명성 회복1999년 동아대박물관 사상 첫 발굴조사소가야 지배층 무덤 입증 옥·구슬 장신구 출토 경남 고성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시대의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개간 등으로 많이 훼손됐지만 원래 10여 기의 대형봉토분이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봉토분은 모두 6기다. 일제의 도굴과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 온 송학동고분군은 소가야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④ 옥전고분군삼국시대 당시 신라·백제 다투던 무대해발 50~80m 낮은 야산 정상부 위치높은 기술력 장신구·무기 출토 사실고구려 남정 때 금관가야 이주 입증 김해의 금관가야를 시작으로 가야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걸쳐 약 500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가야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전해지는 가야의 역사는 고려 말에 편찬된 에 부분적으로 나온다. 이 책에서는 '금관가야와 5가야가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가야 토기 출토 범위를 통해 가야연맹체를 이룬 소국이 10개
경남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삼한시대부터 아라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엽까지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고분군이다. 100기가 넘은 고분으로 구성돼 가야의 고분군 중 최대 규모다.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하지만 대다수 경남도민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김해에서 자동차로 남해고속도로를 40분 정도 달리면 함안 가야읍에 도착한다. 가야읍을 둘러보면 4~5층의 낮은 건물들 뒤로 완만하게 솟은 나지막한 구릉이 눈에 띈다. 곳곳에 곱게 머리를 깎아 놓은 동자승 머리 같은 봉우리가 보인다
② 고령 지산동고분군 고총만 700여개 가야 고분군 중 최대영·호남 주름잡은 대가야 위상 입증조식 남명 "산위에 저게 뭐냐" 놀라기도일제강점기 때 발굴 유물 대부분 일본행44·45호분 순장묘 사후세계 신봉 증거 고대 가야에는 두 개의 건국신화가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고려 후기 일연스님이 에 김해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한 문인이 저술한 를 인용한 내용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 6개가 깨져 동자 6명이 됐다.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왕 김수로왕이고 나머지 다섯 동자는 다섯 가야의
가야의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함안 말이산고분군은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함께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경남도 등은 최종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해시민들 중에는 가야의 고분군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금관가야 등 6가야 고분군 현장을 둘러봄으로써 시민들의 가야 유적에 대한 이해를 높여 세계유산 등재 추진 운동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한다.금관가야 왕과 지배세력들의 무덤통형동기·벽옥제석제품 동시 발굴 유일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반박 증거도 나와 고구려, 백제, 신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