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창간 1주년을 맞아 지난 2011년 11월 30일자에 첫 선을 보인 시리즈 '발굴-김해인물열전'이 지난 29일자 '김해교회 설립자 배성두 편'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무용가 박외선처럼 가 최초로 발굴해 보도한 사례도 있었다.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각계에서 이 시리즈를 김해의 정신 문화 고양을 위한 단초로
취재후기 - 못다한 이야기선조의 발자취 찾고 소중히 간직하는 후손들 감동길잡이 돼준 지역 문화계 관계자들께도 깊은 감사"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에 감사드립니다. 후손들도 모르고 있던 내용을 찾아서 소개해 주신 점 고맙습니다." 거인 류진옥의 후손 류구현 씨가 기자에게 보내온 메일의 내용이다. 가끔 날아드는 이런 메일이나
구한말, 이 땅에 서양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유학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들어온 것도 이 시점이다. 양반 사대부 중심으로 전개된 유학의 세계에서 소외됐던 백성들과 신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됐다. 초창기의 교회들은 대부분 외국인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냈다. 권력과 문화의 중심지인 중앙을 떠나 먼 변방으로 보내진 죄인들은 일정 기간 동안 제한된 곳에서 살아야 했다. 이를 귀양이라고 한다. 원래 말은 귀향(歸鄕)이다. 죄를 지어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귀향하게 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는 유배(流配)라는 말을 많이 썼다. 죄인이라고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다. 구한말에 태어나 1970년대 초까지 살았던 사람들은 숨가쁘게 변해가는 격동의 역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리라. 더러는 세속의 흐름에 흔들리기도 했을 것이다. 이번호 '인물열전'은 김해 장유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유학자로 살았던 월헌 이보림의 삶과 학문세계를 살펴본다. 급변하는 세상을 살았으나, 학자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마
근대 이전의 많은 국가가 신분제 사회였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자조선은 범죄자를, 고구려 신라 백제는 전쟁포로를 노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도 신분사회였다. 양반과 중인, 상민, 그리고 노비가 있었다. 조선의 최하층민 노비는 '종'으로 불렸다. '노(奴)'는 남자 종을, '비(婢)'는 여자 종을 말한다. 이들은 사고 팔 수 있는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지만, 한 국가나 지역의 문화를 다른 곳으로 전파하고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임진왜란을 달리 '도자기전쟁'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런 맥락에서다. 전란 중 일본은 조선의 사기장들을 무수히 끌고 갔다. 도자기 생산 기법을 몰랐던 일본은 이들 덕에 비로소 도자기를 생산하게 됐고, 도자기 발전의 혁명적 계기를 맞았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운동 초기, 조선의 유림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인 유림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엄청난 충격과 분노와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유림들은 한국의 독립의지를 밝힌 독립청원서를, 1919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
우죽 배병민(又竹 裵秉民·1875~1936)은 차산 배전(1843~1899·조선말 개화사상가·시인·서화가. 김해뉴스 지난 2월 22일자 '인물열전' 참조)의 직제자이다. 차산의 화풍을 이어받아 문인들의 정신세계를 담은 사군자를 주로 그렸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우죽은 일제강점기하에서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전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박외선은 훌륭한 선생이었고 또 아름다운 무용가였다. 1971년에 이화여대 무용학과에 입학한 정귀인 부산대 무용학과 교수는 학부 시절 내내 제자로, 대학원 시절에는 조교로, 박외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정 교수는 말했다. "선생님은 서 있는 자태만으로도 무용가이셨죠. 지적인 분위기, 아름다움, 그리고 우아한 품위까지
일제 때인 1920년대. 평범한 집안에서 딸이 무용을 배우겠다고 나설 경우 부모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요즘이야 자식이 하고 싶다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세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딸이 무용을 배운다고 하면 반대하는 부모가 더 많았을 것이다.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이자 교육자였던 박외선(1915~2011) 선생도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용가의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를 들으면 오빠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서…." 가수 김영춘의 여동생 김복득(88·부원동) 씨는 말끝을 잊지 못했다. 아직도 먼저 간 오빠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다. 김 씨는 어방동 본가에서 태어나 부원동에서 한 평생을 살았고, 지금도 부원동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이 일곱 남
'이야기에는 거짓이 있어도, 노래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이 있다. 노랫말은, 또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음색은 듣는 이의 가슴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1939년에 처음 나온 '홍도야 우지마라'가 바로 그런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김해 사람 김영춘이다. 김영춘의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와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한 사람의 생몰연도를 보면, 그의 인생에 작용했을 굵직한 사건들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람들의 삶은, 우리나라의 엄혹한 근현대사와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국가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던 시기였다.정진업(1916~1983) 시인의 삶 역시 그러했다. 정진업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갖은 수탈과 억압을 받았던
권탁은 안동 권씨의 후손으로, 경상도 선산부 월동리에서 아버지 권길원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원(思遠)이다. 얼굴과 거동이 뛰어나게 아름다웠고, 키가 컸으며, 힘 또한 셌다. 권탁은 김해 출신이 아니지만, '김해의 인물'로 꼽힌다. 는 권탁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동인(안동 권씨). 임란
수로왕릉은 김해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왕의 무덤으로 인해 김해는 '가야 고도'로서 빛난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만약 이 수로왕릉이 훼손되어 없어졌다면 지금 김해의 처지는 어떠할까?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뻔 했다. 김해를 침략한 왜적들은 수로왕릉을 파헤쳤다. 왜적을 피해 노모를 모시고 피란을 갔던 죽암 허경윤(竹巖 許景胤
안병목은 1906년 김해 진례면 시례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후 시례리 상촌마을에서 터를 잡은 광주안씨 안경지 공의 후손이다. 자는 문숙(文淑), 호는 수암(修庵)이다. 수암은 어려서 조부인 예강 안언호(본보 4월 4일자 보도)에게서 글을 배웠다. 김해에서 밀양으로 이주한 금주 허채(錦洲 許埰. 1859∼1935·조선말기의 학자)가 1
1592년, 일본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일본은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1598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온 나라가 왜군의 말발굽 아래 신음할 때,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김해에서도 왜군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던진 의로
허발(1874~1931)선생은 김해와 일제에 강점당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선각자적 인물이었다. 김해에 학교를 세우고, 김해의 경제를 위해 일했고, 독립운동 자금으로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그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나, 선생이 남긴 업적만은 김해에 오롯이 남아있다. '
'문화원'은 각 지역의 향토문화창달을 위해 문화 및 사회교육사업을 실시하는 비영리 특수 법인체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여 개가 넘는 문화원이 있다.김해문화원은 1956년 개원했다. 김해문화원의 발전을 위해 역대 원장들과 회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중에서도 작고한 9~11대 원장 이병태(1923~2005) 씨의 업적은 특히 남다르다.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