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수로왕릉은 서기 42년 김해지역에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묘역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199년 수로왕이 죽고 그 아들 거등왕이 대궐에서 동북쪽에 능을 조성할 때의 이야기다. 장사를 지내려고 인부들이 흙을 파기 시작하자 난데없이 큰 물길이 묘 한가운데 솟구쳐 도저히 일을 진행할
방물장수 꼬임에 넘어간 섭개 부자솔맡 어여쁜 과수댁 집 드나들어안채 마누라 "귀신은 뭐하는고…"영감 뒤쫓던 길 소복 여인 나타나소원 말하며 "딴살림 막아주겠다"귀신과 하룻밤 지낸 부자 혼비백산옛날에 김해 섭개(성포마을)에 한 부자가 있었다. 곳간은 넉넉하고 자식도 아들 딸을 잘 두었다. 부자는 세상에 걱정이
문경새재 홍 두령과 산채 사람들 붙잡혀참수당하고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에민초들의 어려움 살펴줄 것 상소로 호소매화로 상징되는 사대부 세계 시로 호통어 선비 시세계, 홍길동전으로 형상화돼어무적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백성들의 궁핍하고 처참한 생활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다. 답답한 가슴을 토로할 곳이라고는 오로지 시뿐이었다. 어무적은 자연경관의 아름
연산군 재위 6년 1500년 무렵에, 후줄근한 차림의 선비가 문경 새재를 넘고 있었다. 선비가 한양에서 괴산을 지나 새재길로 접어든 것은 한 시진 전이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얼룩이 진 무명 두루마기를, 벗을 생각을 하지 않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이 시름을 잔뜩 짊어진 걸음걸이였다. 정수리에 꽂히는 볕이 화살처럼 날카로운 음력 칠월의 한낮이었다. 계곡을
쏟아지는 빗속에 엎드려 통곡하는 선비도와준 순티에게 "내 님도 열다섯이라네"깨치미만 먹으며 동쪽 하염없이 그려사람들은 김 선비를 '육일거사'라 불러선비 사후 고개 빚대 '깨치미고개' 이름김해 한림면 퇴래리 물은이(퇴은마을)는 야트막한 산과 구릉지대에 자리잡은 아담한 마을이었다. 앞쪽으로 높고 낮은 산봉우리가 둘러싼 작은 들판이 펼쳐
옛날 상동 광재에 석룡(石龍)이란 사람이 있었다. 석룡은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말이 부드러웠다. 끼니 때가 되면 반드시 직접 밥상을 들고 가서 아버지가 잘 드시는지 살핀 다음에 비로소 밥을 먹었고, 들어오고 나갈 때는 꼭 고했다. 허름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버지를 위해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마련하는
김해성을 향해 물밀듯 밀려드는 왜군사충신을 중심으로 결사항전으로 맞서의로운 죽음으로 끝난 임란 최초 의병전그들이 진 자리 아직도 그 향기 남아2.두 번째 전투가 끝난 뒤에야 총사령관 구로다는 김해성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높은 성벽과 깊은 호에 기대어 있는 김해성에서 시간을 끈다면 한양까지 단시일에 진격하려던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은빛 의자에 높이 앉아 김해성을 노려보던 구로다는 군사들을 성의 북쪽으로 보냈다. 구로다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며 성의 젖줄이 되고 있는 호계천 상류를 흙가마니로 막았다. 호계천의 물길이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한 지 이틀만에 죽도에 도착한 왜군 김해성 공격 채비 이대형·송빈·김득기 "성을 지키겠다" 왜군, 1차 공격 이틀 뒤 대대적 침략"도적놈들에게 성을 내어줄 수 없다" 결사항전으로 두번의 공격 막아내는데…1. 1592년 임진년 전쟁은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
장유사 맥 이은 가야불교 요람 중봉사불모산 산삼 효험 장군수에 중생 밀물절 살림 흥했지만 적선 않고 재물탐닉 사미에게 업힌 노승 "중봉사로 가자"대웅전 뒤편 산삼 모두 캔 뒤 빈대 풀어승려들 하나 둘 떠나고 몇년 뒤 빈 절만1.김해 장유 불모산은 일곱 왕자를 출가시킨 허황옥 왕후를 불모(佛母)로 추앙하여 붙인 이름이다. 허왕후가 수로왕과
고려 건국 공훈 명문가 광주 안 씨 종파진영 의전에 살며 가세 기울어 종살이민중 "머슴 살아도 근본 지키겠습니다"성실함에 감복한 주인이 혼담 넣어 장가농삿일 걱정에 새신부 두고 물꼬 막으러화난 장인도 자초지종 듣고 "믿음직"훗날 큰아들이 아버지 이름으로 진사시효심 알려져 대리시험 처벌도 받지 않아아들 헌정 진사 벼슬 덕
나뭇짐을 지고 장에 갔지만 여인의 향기와 이상한 기분이 영 사라지지 않았다. 여인을 만난 때문인지 그날은 더 간절히 어머니 생각이 났다. 무득은 어머니도 저세상에서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향기를 내며 편안히 지내도록 더 지극히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다 팔고 돌아오니 아버지와 무람하게 지내는 사람이 와 있었다. 그는 무득이 일을 잘 하니 기특하다고
고려시대 물만골 숯 굽는 부부에게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아들 태어나지나던 중이 이름 지어주며 "착한 아이"역병으로 어머니 잃고 슬퍼하던 무득 그리움 삭이려 여제단으로 가던 중야릇한 향기의 여인과 마주치는데 … 김해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해반천은 감분과 곡내, 큰구분등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삼계동에서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 해반천이
오리방마을 연이 맘에 둔 봉하 총각 바우야속하게 떠난 여인 그리워하며 미쳐가자왕골 자암 스님이 동굴에 가두고 막아"돌문을 열고 연이에게 가려고 합니다""마음의 정과 망치로 열어야 할 것이야"불상 새긴 뒤 앙상한 모습으로 세상 떠나 옛날 진영 봉하마을에 바우라는 총각이 있었다. 바우는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겼지만 영리하고
조선의 3대 간신 중 한 명 김자점손부 효명옹주와 함께 갖은 횡포내삼리 백성들 옥토 뺏기고 부역암행어사 상소에 "본때 보여주마"결혼 앞둔 청년 주동자 몰아 죽여스님, 주인 잃은 나무기러기 이용"날개 돋으면 일을 도모해야 하오"김자점, 꾐에 빠져 모반 후 몰락1. 조선 인조 말엽, 주촌면 내삼리 자지마을(紫峴). 주씨(周氏
상동 소락마을 의좋던 다리·부리 형제형 다리 심술궂은 여자와 혼인 후 변해노모와 동생 부리를 초가집으로 내몰아개울가에서 만난 '말하는 자라'로 큰돈욕심 난 형과 형수 억지 부려 빼앗아가자라 죽은 자리 대나무숲 돼 다리 망해 옛날 상동면 우계리 소락마을에 다리와 부리 형제가 있었다. 부지런하고 착한 형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의좋게 살았다. 그
아기장수 운명 타고난 송임의 아들겨드랑이 비늘 날로 커지며 힘자랑아내는 아이가 해 입을까 노심초사"날음산 못 용마를 죽여야 한대요"용마 잡은 뒤 아들의 비늘 잘라내참다 못한 송임의 아내는 아기를 안고 담안마을 시댁을 찾아갔다. 하소연을 들은 어머니는 며느리를 불티재 돌부처 앞에 데리고 갔다. "이 불상은 네 남편의 힘을 꺾어 보려
세상을 바꿀 힘과 지략 갖춘 아이들나라에서 역적 누명 씌워 죽여버린 탓진례 청주 송씨 집안에도 큰 걱정"이제부터 숨기고 잘 다스리겠습니다"진례면에는 청주 송씨(淸州 宋氏) 집성촌이 많다. 그 중에서도 학문 높은 선비가 많이 났다 하여 김해부사가 석축을 쌓아 보호한 마을이 있으니 바로 담안(장내·墻內)이다. 조선 정조 임금 때
과거 낙방 아들들 탓에 속상한 이 좌수가막소 떳다리 없애라는 불당골 중 말에영험한 돌다리 무너뜨리려 장정들 모아사람들 만류에도 "치워버리고 말겠어"다리 지키는 뱀과 기싸움 끝에 황천행상가에도 뱀 몰려들어 자손들 줄행랑주촌면 금음산에는 유달리 샘이 많았다. 어느 때 그 금음산 자락에 자리 잡은 고을 새미실(泉谷里) 안의 연말이라는 마을에 이
새경 대신 받은 해반천 가 버려진 땅풀 캐고 두렁 쌓아 옥답 만들었더니욕심 많은 부자는 호시탐탐 빼앗으려큰비 잇따라 내려 흉년 덮친 어느 해"곡식 꾸어줄 테니 굼텅이 논과 바꿈세"보릿고개 풀죽 끼니로 아이들마저 탈"된장 한 사발만 있으면 나을 텐데"그렇게 바꾼 논이 훗날 자식 농사 밑거름 1.어느 때, 김해 구산동 물만골
옛날 옛적 김해 땅에 착하고 어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더란다. 그 사람들은 꽃이 피고 지고, 비 내리고 눈 오는 아름다운 마을에서 의좋게 지냈지. 호호할머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귀여운 아가들이 또 태어났단다. 그래서 언덕 하나 넘고 개울 하나 팔짝 뛰어넘어가도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는구나. 지금부터 가 들려주는 김해의 옛날이야기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