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현주 기자
- 승인 2014.09.17 09:09
"춘향전 한 자락 읊어보시게." 아버지가 부탁하면 어머니는 "지겹지도 않소"하면서 판소리 한 대목을 펼쳤다. 밤마다 안방에서는 판소리 안방극장이 열렸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수궁가…. 어머니의 소리를 통해 판소리를 자연스럽게 익혔던 소녀는 자라서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이 되었다. 우인덕(57) 씨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 맑은 민요소리에 반한 사람이다. 김해에서 경서도민요연구원을 운영하는 그를 만났다.
우인덕경서도민요연구원은 장유휴게소 뒤편에 있다. 부산 방향 장유휴게소에 도착한 뒤 막상 연구원을 찾으려니 좀 난감했다. 무작정 휴게소 뒤편을 어슬렁거리노라니, 어디선가 북소리 장구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게소 뒤편의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연구원이 나왔다. 불모산 자락이 시작되는 곳에 연구원이 있었다. 연구원은 지하층에 있었고, 위층은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연구원은 우인덕의 소리 공부 공간이면서, 동료 국악인들의 연습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결혼하며 장유로 와 판소리 공부 지속
남도소리와 다른 경기민요에 큰 매력
늦깎이 대학생으로 공부 … 제자도 길러
우인덕은 1958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호계리 갈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리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강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가 소리를 잘했어요. 아버지가 '여보게, 밤도 긴데 춘향전 한 대목 읊어보시게' 하시면서 청을 하면, 어머니는 '아따, 저녁마다 하는 거 싫증도 안 나요'하고 짐짓 딴청을 피우고, 그럼 아버지는 다시 '빼지 말고 한번 해보시게' 재청을 하셨죠. 그렇게 밤마다 우리 집에서는 판소리 안방극장이 펼쳐졌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판소리 다섯마당 줄거리를 외우면서 자랐지요." 그는 어머니가 들려주는 판소리 중에서도 <춘향전>의 이몽룡이 '장모 덕에 내가 어사가 됐구나' 하는 대목과 춘향이가 부르는 쑥대머리,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청이를 업고 젖동냥 다니는 대목, <수궁가>에서 토끼가 도망치는 대목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어머니가 아끼던 판소리 책을 떠올렸다. "붓으로 판소리 가사를 쓰고, 종이가 찢어지지 말라고 기름을 먹여 책장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지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그 책 안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싶어서 신기했습니다."
어머니의 소리는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면 어머니가 장구를 매고 소리를 했다. 그런 날이면 인근 마을 남자들이 "갈전에 잔치 있단다. 광주댁 소리 들으러가자"며 몰려들곤 했다. 광주댁은 어머니의 택호이다. "잔치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갑작스럽게 초상이 났을 때도 어머니를 찾는 어른들이 계셨지요. 씻김굿 중에서도 관 앞에서 하는 '관머리씻김굿'을 최고로 치는데, 경황이 없어 굿할 사람을 부르지 못했을 때 어머니를 특별히 청하곤 했어요. 어머니는 다른 마을에는 안 갔지만, 우리 마을에서 늘 뵙던 어른을 보낼 때는 관머리씻김굿을 했어요."
뿐만이랴. 그는 여름이면 정자아래에 모여 무릎장단을 치며 소리를 하는 마을 어른들 옆에서 놀며 자랐다. 친구들과 소꿉장난을 할 때도 진도아리랑을 동요처럼 부르며 놀았다.
여학생 시절에는 제철에 나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을 쪄 가운데 놓고 또래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그 때도 돌아가면서 진도아리랑이며 시조창과 단가를 한 자락씩 했다. 유행가를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소리는 그의 일상이었다.
"장날이 되면 약장수들이 국극 단원들을 데리고 왔어요. 천막을 치고 공연을 보여주며 약을 팔았는데, 우리는 그걸 '나이롱극장'이라고 불렀죠. 전 그 공연에 푹 빠져버렸어요. 장날이면 선생님한테 가서 배가 아파 집에 일찍 가야겠다고 핑계를 대고는 나이롱극장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너, 또 나이롱극장 갈려고 그라제' 하시면서도 보내주셨어요. 교복을 입고 입구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천막자락을 어떻게든 들추고 들어가, 표 검사하는 사람을 이리 저리 피해 다니면서 공연을 보고 그 소리에 빠져들었죠. '마의태자', '사도세자', '버들아씨', '콩쥐팥쥐', '장화홍련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향전', '수궁가' 이런 공연들을 보면서 웃다 울다…. 어느 날은 공연을 보면서 한창 눈물바람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한테 딱 들켰지 뭐예요. '너, 또 배 아프다고 그랬냐' 나무라는 어머니께 '엄니, 아부지한테는 이르지 마' 부탁하고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공연을 봤어요. 어머니도 소리를 좋아하셨으니 눈감아 주신 거죠."
성요셉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서 사업하는 외사촌 오빠의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그가 21세 때 다정하고 목청 좋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서둘렀다. 22세 때 그는 결혼을 했고 김해 장유로 왔다. 결혼한 지 3개월 됐을 때 어머니의 첫 기일이 돌아왔다. 제사를 준비하던 바로 그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셨죠. 그래서 어머니 기일에 두 분이 만나 함께 가셨나보다, 그렇게들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