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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 구르듯 맑고 청아한 소리의 멋에 흠뻑민요 소리꾼 우인덕과 '경서도민요연구원'
  • 박현주 기자
  • 승인 2014.09.17 09:09
  • 호수 189
  • 10면

"춘향전 한 자락 읊어보시게." 아버지가 부탁하면 어머니는 "지겹지도 않소"하면서 판소리 한 대목을 펼쳤다. 밤마다 안방에서는 판소리 안방극장이 열렸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수궁가…. 어머니의 소리를 통해 판소리를 자연스럽게 익혔던 소녀는 자라서 민요를 부르는 소리꾼이 되었다. 우인덕(57) 씨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 맑은 민요소리에 반한 사람이다. 김해에서 경서도민요연구원을 운영하는 그를 만났다. 

우인덕경서도민요연구원은 장유휴게소 뒤편에 있다. 부산 방향 장유휴게소에 도착한 뒤 막상 연구원을 찾으려니 좀 난감했다. 무작정 휴게소 뒤편을 어슬렁거리노라니, 어디선가 북소리 장구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게소 뒤편의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연구원이 나왔다. 불모산 자락이 시작되는 곳에 연구원이 있었다. 연구원은 지하층에 있었고, 위층은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연구원은 우인덕의 소리 공부 공간이면서, 동료 국악인들의 연습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 맑고 청아한 멋을 지닌 민요의 매력에 빠져 경서도민요를 공부하고 보급하는 우인덕 씨가 잠시 옛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소리 본고장 전라도 강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소리에 익숙
"목청 좋던 어머니가 늘 불러주시곤 했죠"

결혼하며 장유로 와 판소리 공부 지속
남도소리와 다른 경기민요에 큰 매력
늦깎이 대학생으로 공부 … 제자도 길러

우인덕은 1958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호계리 갈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리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강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가 소리를 잘했어요. 아버지가 '여보게, 밤도 긴데 춘향전 한 대목 읊어보시게' 하시면서 청을 하면, 어머니는 '아따, 저녁마다 하는 거 싫증도 안 나요'하고 짐짓 딴청을 피우고, 그럼 아버지는 다시 '빼지 말고 한번 해보시게' 재청을 하셨죠. 그렇게 밤마다 우리 집에서는 판소리 안방극장이 펼쳐졌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판소리 다섯마당 줄거리를 외우면서 자랐지요." 그는 어머니가 들려주는 판소리 중에서도 <춘향전>의 이몽룡이 '장모 덕에 내가 어사가 됐구나' 하는 대목과 춘향이가 부르는 쑥대머리, <심청전>에서 심봉사가 청이를 업고 젖동냥 다니는 대목, <수궁가>에서 토끼가 도망치는 대목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어머니가 아끼던 판소리 책을 떠올렸다. "붓으로 판소리 가사를 쓰고, 종이가 찢어지지 말라고 기름을 먹여 책장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지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그 책 안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싶어서 신기했습니다."

어머니의 소리는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나 있었다.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면 어머니가 장구를 매고 소리를 했다. 그런 날이면 인근 마을 남자들이 "갈전에 잔치 있단다. 광주댁 소리 들으러가자"며 몰려들곤 했다. 광주댁은 어머니의 택호이다. "잔치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갑작스럽게 초상이 났을 때도 어머니를 찾는 어른들이 계셨지요. 씻김굿 중에서도 관 앞에서 하는 '관머리씻김굿'을 최고로 치는데, 경황이 없어 굿할 사람을 부르지 못했을 때 어머니를 특별히 청하곤 했어요. 어머니는 다른 마을에는 안 갔지만, 우리 마을에서 늘 뵙던 어른을 보낼 때는 관머리씻김굿을 했어요."

뿐만이랴. 그는 여름이면 정자아래에 모여 무릎장단을 치며 소리를 하는 마을 어른들 옆에서 놀며 자랐다. 친구들과 소꿉장난을 할 때도 진도아리랑을 동요처럼 부르며 놀았다.

여학생 시절에는 제철에 나는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을 쪄 가운데 놓고 또래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그 때도 돌아가면서 진도아리랑이며 시조창과 단가를 한 자락씩 했다. 유행가를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소리는 그의 일상이었다.

"장날이 되면 약장수들이 국극 단원들을 데리고 왔어요. 천막을 치고 공연을 보여주며 약을 팔았는데, 우리는 그걸 '나이롱극장'이라고 불렀죠. 전 그 공연에 푹 빠져버렸어요. 장날이면 선생님한테 가서 배가 아파 집에 일찍 가야겠다고 핑계를 대고는 나이롱극장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너, 또 나이롱극장 갈려고 그라제' 하시면서도 보내주셨어요. 교복을 입고 입구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천막자락을 어떻게든 들추고 들어가, 표 검사하는 사람을 이리 저리 피해 다니면서 공연을 보고 그 소리에 빠져들었죠. '마의태자', '사도세자', '버들아씨', '콩쥐팥쥐', '장화홍련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향전', '수궁가' 이런 공연들을 보면서 웃다 울다…. 어느 날은 공연을 보면서 한창 눈물바람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한테 딱 들켰지 뭐예요. '너, 또 배 아프다고 그랬냐' 나무라는 어머니께 '엄니, 아부지한테는 이르지 마' 부탁하고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공연을 봤어요. 어머니도 소리를 좋아하셨으니 눈감아 주신 거죠." 

성요셉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서 사업하는 외사촌 오빠의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했다. 그가 21세 때 다정하고 목청 좋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는 딸의 결혼을 서둘렀다. 22세 때 그는 결혼을 했고 김해 장유로 왔다. 결혼한 지 3개월 됐을 때 어머니의 첫 기일이 돌아왔다. 제사를 준비하던 바로 그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셨죠. 그래서 어머니 기일에 두 분이 만나 함께 가셨나보다, 그렇게들 말했습니다."

   
▲ 장유휴게소 뒤편에 있는 우인덕경서도민요연구원 전경.

시댁은 장유에서 농사를 크게 짓는 집이었다. 그 땅에 지금의 장유휴게소가 들어섰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의 집과 연구원이 장유휴게소 뒤편에 있는 까닭이 이해가 됐다.

소리를 좋아했던 그는 장유에서 부산을 오가며 지수복 선생에게서 판소리를 계속 배웠다. 지수복은 우리나라 국악계의 큰 어른인 지영희(1909~1979·해금산조와 시나위의 명인) 선생의 따님이다. 우인덕은 지수복 문하에서 1990년부터 1995년까지 6년간 판소리를 사사했다.

그러던 중 서른을 조금 넘긴 어느 해에 경기민요를 접하게 됐다. "어렸을 적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남도소리와는 또다른 매력이 있었지요. 구슬 구르듯 도골도골 굴러가는, 맑고 청아한 소리의 멋에 매료된 거지요. 맑고, 밝고, 경쾌하고…. 민요를 부르는 동안 마음도 즐거워지더군요."

그는 1994년부터 김경민(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이수자) 선생에게 선소리산타령을 사사하고 있다. 현재는 선소리산타령 장유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공부는 계속됐다. 2008년부터는 김보연(중요무형문화재 57호 경기민요이수자) 선생에게 경기민요를 사사하고 있고, 2010년부터는 이유라 강원소리보존회 이사장에게서 경기민요를 배우고 있다.

"남도소리와 경기민요는 쓰는 목이 달라요. 4년 정도 남도소리와 경기민요를 함께 배웠지만 안되겠다 싶어 결국 남도소리를 접었지요. 이후 경서도민요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서도민요는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작사자도 작곡가도 전해져오지 않지만 민요는 이 땅에서 수백 년 살아온 민중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노래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산자락 하나 넘고, 강줄기 하나 건너면 소리가 달라졌다. 지역적으로 남도민요. 경기민요, 서도민요(황해도, 평안도 등 이북지역의 민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 말엽부터 일제치하를 거치는 시기에, 서울의 소리꾼들은 경기민요를 중심으로 한 경서도민요를 많이 불렀다. 1910년부터 경서도 명창으로 활동하며 문하생들을 길러온 최경식에 의해 1930년에는 경서도명창들의 모임인 조선성악연구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경서도민요는 당시 민중들의 애환을 달래준 대표적인 우리 소리였고, 경서도 명창들은 다투어 음반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서도민요가 분단 이후에도 남한지역에서 계속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경서도민요 분야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소리꾼들 덕분이다.

우인덕은 현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학과에 재학 중이다. "소리 공부를 계속 하는 동안 후배들도, 제자들도 생겼어요. 경서도민요도 김해에 조금씩 보급되었죠. 그러는 사이 어느새 저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었어요. 그 호칭이 부끄러워서 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부산시와 부산국제크루즈 환영 환송행사를 준비하던 중에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했는지 아닌지 하는 말을 얼핏 들었습니다. '선생님' 소리를 듣는 만큼 전문가 자격도 있어야겠구나 싶어 만학도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말이 소리가 되는 것이니, 사투리 발음을 교정하기 위해 7개월 정도 서울까지 비행기를 타고 오가며 사투리발음을 교정하고 소리를 가다듬었지요. 동국대학교 한국음악학과에는 수시전형으로 합격했어요."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공부를 할 계획이다. "제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공부할 겁니다. 열심히 배우고 더 겸손해져야죠."

김해민속보존회 민요분과 분과장을 맡고 있는 그는 김해를 위한 다양한 활동도 구상하고 있다. "김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 외지에서 김해로 온 분들, 다문화가족들, 모두가 함께 노래하고 함께 춤추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일. 그런 프로그램을 꾸려갈 생각입니다."

   
 
≫우인덕
우인덕경서도민요연구원 원장, 우인덕예술단 단장, (사)중요무형문화재 선소리산타령 장유지부장. 2010년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종합대상(국회의장상), 2006년 대한민국청소년 대상(국악지도자대상), 2011년 봉사상 수상(부산광역시 시장상) 등 수상 다수. 2013년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심사위원, 2014년 안산민요경창대회 심사위원 역임.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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