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포천 범람으로 여름이면 침수 피해
고기 숨는 명당 이야기에서 이름 유래
마실 물 귀해 공동우물은 매일 장사진
100년 된 포구나무 당산제는 명맥 끊겨


▲ 어은마을을 100년 이상 지켜온 당산나무. 7~8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메거지(메기의 김해 사투리)가 입으로 물을 내놓기만 해도 홍수가 났던 마을입니다."

한림면 사람들은 안하리 어은(漁隱)마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근 화포천의 범람으로 워낙 침수가 잦았던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고기 어(漁), 숨을 은(隱) 한자를 쓰는 마을의 이름은 '고기가 숨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을 북쪽에 고기가 숨어서 노는 모양의 명당이 있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한림면 명동사거리를 지나 한림면주민센터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화포천을 건너는 화포교가 나타난다. 다리에 진입하기 직전 오른쪽에 산자락을 두르고 형성된 어은마을이 있다. 푸른 들판을 지나 차로 5분 정도 들어가자 큼큼한 퇴비 냄새와 함께 보랏빛 도라지꽃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손님을 반갑게 맞는다.

도라지꽃 뒤에 소박한 모습의 어은마을회관이 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어은마을노인회 김종택(72) 회장은 어은마을에서 50년 넘게 살아왔다. 마을의 옛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부탁에 그는 화포천 범람으로 힘겨웠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여름철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면 마을에는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진례면 대암산에서 발원해 진례면, 진영읍, 한림면을 거쳐 흐르는 화포천은 장마철만 되면 수시로 범람했다. 벼농사 외에는 별다른 수입원이 없었던 마을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제방을 쌓아 마을이 침수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다.

"다들 팔을 걷어붙이고 제방을 쌓았어요. 제방이 터지는 순간 마을은 침수되고, 한 해 농사도 다 망쳤죠. 제방이 터지고 화포천 물이 넘치면 마을은 몇 번이나 물에 잠겼어요. 2002년에는 주민들이 살 곳을 잃기도 했습니다."

평소 장방리에 서는 오일장을 찾았던 어은마을 주민들은 화포천이 범람하고 도로가 물에 잠기면 나룻배를 타고 화포천을 건너 장방리 오일장에 가야했다.

그렇다고 화포천이 마을사람들에게 마냥 해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풍부한 수량 덕분에 화포천은 '물 반, 고기 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살았다. 김 회장은 "들살이라는 바구니 모양의 고기잡이 도구를 화포천에 넣었다가 빼기만 해도 바구니가 가득 찰 정도로 잉어와 메기가 많이 잡혔다. 일부 마을사람들은 잡은 물고기를 장터에 내다팔아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화포천이 '물 반, 고기 반'이었던 시절 가장 큰 수혜를 입었던 곳은 어은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식당 '화포메기국'이었다. 어은마을 주민이 3대째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마을사람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화포천은 또 어은마을 사람들에게 집을 짓는 천연재료를 주기도 했다. 주민들은 화포천 일대에서 자라는 갈대를 이용해 초막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초막집은 갈대를 지붕의 재료로 사용해 지은 집이다. "볏짚을 지붕 재료로 사용한 초가집은 1년에 한 번씩 지붕을 갈아줘야해요. 하지만 초막집의 경우, 갈대가 워낙 질기고 튼튼해 한 번 지붕을 만들어놓으면 10년 이상 쓸 수 있었어요. 지금은 마을에서 초막집을 찾을 수 없지만 옛날에는 대부분 초막집을 짓고 살았어요."

▲ 지금은 폐쇄됐지만 마을사람들의 식수원 역할을 했던 공동우물.
화포천을 끼고 있는 탓에 항상 물은 풍부했지만 수질이 나빠 정작 마실 물은 귀했다. 30년 전만 해도 마을사람들은 음용수를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마을 우물에 줄을 서야 했다. 마을회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우물은 지금은 폐쇄된 채 흔적만 남아 있다.

마을회관에서 화포교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가자 마을의 당산나무인 100년 이상 된 포구나무가 푸른 잎사귀를 뽐내고 있었다. 김 회장은 "7~8년 전만 해도 마을에 있는 대은암 주지스님이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이제는 지내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어은마을은 공장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선 한림면의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 공장은 적은 편이다. 지금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소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여느 농촌마을처럼 이곳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김 회장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만 몇 명 있다. 초등·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사람 냄새가 나는 옛 마을의 모습이 그립다"고 아쉬워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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