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나 은행 근처에서 도장을 파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미처 도장을 준비하지 못한 관공서 민원인들이 급한 마음에 인근의 자그마한 도장 가게에서 싼 목도장을 파던 시절이 있었다. 그 목도장은 용도가 다하면 금세 잊혀지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 이름 석자를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판 예술적 인장이라면 그렇게 쉽게 잊힐 리가 있을까. 서예와 전각을 익힌 문개주(54) 씨는 손으로 인장을 판다. 지금은 컴퓨터에 입력된 활자를 기계가 파내는 시대이지만,  그는 직접 글씨를 쓰고 새긴다. 김해의 인장예술가 문개주 씨가 운영하는 '벽오동 인장예술연구소'를 방문했다.

'벽오동 인장예술연구소'는 수로왕릉 맞은편, 서상동 331의 5에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 4개가 보였다. 문개주의 아내가 이곳에서 단팥죽과 콩국을 팔고 있었다. 테이블에 앉으니 벽면에 좋은 글귀를 새겨 넣은 나무액자가, 안쪽 진열대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인장석들이 진열돼 있는 게 보였다. 인감으로 사용하는 개인 인장, 부부가 나란히 나누어 가지는 부부인장, 애서가들이 사용하는 장서인, 기관과 단체에서 사용하는 직인들을 새길 인장석들이었다.

▲ "한 사람의 이름을 아름답게 새긴 인장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예술작품입니다." 인장석을 다루는 문개주 씨의 눈빛은 매섭고 또 진지하다. 박나래 skfoqkr@

문개주는 경남 합천 율곡면 본천리에서 태어났다. "시골마을이라 문화생활을 하거나, 예술작품을 볼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 딱 한 곳 지금도 생각나는 예술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 집 골목 안쪽 집에 가면 군불을 때는 아궁이 위쪽에 편액이 하나 걸려 있었어요. '幽居(유거)'라고 적혀져 있었어요. 은거해 산다는 의미이지요. 아궁이 위에 걸려 있었으니 약간 그을음이 있었는데, 제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그 아궁이 앞에 서서 편액을 한참 쳐다보곤 했습니다. 보기에 좋았어요. 어렸지만, 제 나름대로 감상을 한 거지요. 지금도 그 편액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문자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고 추억했다. "누군가가 담벼락에 낙서해 놓은 것들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었어요. 무슨 말을 어떻게 써놓았는지 궁금해서요. 어딘가에 글자를 써놓은 것은 제게 있어서 마치 알타미라 벽화처럼 신기하게 다가왔어요. 누가 썼느냐에 따라 글자의 형상이 다 다른 게 재미있어서 유심히 보았지요."

▲ 이름과 단체명을 새겨넣은 인장. 뒤에는 인장석들이 진열돼 있다. 박나래 skfoqkr@

글씨 쓰려면 고전과 역사를 알아야 해
의미 담긴 문자 바탕 인장 파고 싶어

자신만의 이름 새긴 인장은 개인 예술품
한 사람의 소망과 기원 형상화해내야


알파벳과 한글을 조합해 암호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가르쳐주고 그 암호로 소통하기도 했다. 이렇게 문자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이 많고, 서예와 전각을 거쳐 인장을 파고 있으니 당연히 글씨도 잘 썼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제가 서예를 하게 된 건 글씨를 못 썼기 때문이에요. 공책에 연필이나 볼펜으로 쓴 제 글씨가 못나 보여 불만이 많아서 서예를 한 겁니다. 서예는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지요. 그림도 못 그렸어요."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18세 무렵, 부산의 나전칠기 회사에 다녔다. 일을 하다 보니 나전칠기 도안에 흥미가 생겼다. "그림부터 알아야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중구 대청동으로 그림을 배우러 갔습니다. 서예학원이었는데 서예·사군자·동양화 등을 가르치는 곳이었죠. 그런데 붓으로 그림을 그리려면 운필법을 알아야 하니까 서예부터 시작하게 된 겁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때 고통이 컸습니다. 연필글씨도 못쓰는데 붓글씨를 배우기가 쉬웠겠습니까? 붓을 던져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지요." 힘들었지만 그는 서예를 계속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나전칠기 회사를 다니면서 저녁마다 서예를 익혔고, 서예는 다시 전각의 입문으로 이어졌다.

"나전칠기가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옻칠 장인인 전용복 교수가 일본의 국보급 건물인 '메구로가조엔'에서 옻칠작업을 할 때, 저도 동료들과 함께 일본으로 갔습니다. 3개월 정도 머물면서 교수님 일을 도와드렸지요. 그렇게 중요한 작업에 동참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의식도 생겼고, 또 서서히 나전칠기에 대한 흥미도 반감됐습니다."

▲ 좋은 글귀를 새겨 넣은 나무 액자는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이다. 박나래 skfoqkr@

그는 일본에서의 작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와 어렸을 적부터 계속 마음이 끌렸던 문자의 세계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동대신동에서 '평강서예학원'을 운영하다가, 1992년 김해 삼방동으로 옮겨 '우호서예학원'을 열었다. 그는 서예학원에서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서예와 전각 실력을 쌓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부산이 자랑하는 한국 서예의 거목인 청남 오제봉 선생과 교류했던 경재 조영조 선생에게서 한문도 배웠습니다. 글씨를 쓰려면 고전과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소학, 자치통감, 대학, 논어, 맹자를 배웠습니다. 경재 선생에게서 전각도 배웠지요. 공부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공부가 대학으로 이어져 방송통신대 중문과를 졸업했고, 인제대 인문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했지요. 배움은 늘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가 '벽오동 인장예술연구소'를 연 것은 2년 전쯤이다. "벽오동 이름을 붙인 까닭은 봉황대유적지에 있는 벽오동 나무를 염두에 뒀기 때문입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 나타나는데, 봉황이 앉은 나무가 벽오동이죠. 그리고 벽오동을 심고 가꾸는 것에는 인재를 키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뜻을 담아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는 "예로부터 인장은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의 인장은 아름답고 품격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인장의 수준이 조잡해지고 말았지요. 저는 아름답고 품격 있는 인장을 파고 싶었습니다. 서예와 전각을 익히면서 내가 예술인장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생겼지요."

그는 예술인장은 예술이면서 한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장은 내 이름을 새긴 나만의 예술작품인거죠. 고흐의 그림은 뛰어난 예술작품이지만, 설사 돈을 주고 살 수 있어도 그것은 완벽하게 한 사람의 것이 될 수 없어요. 하지만, 예술적 테크닉이 뛰어난 사람이 한 사람의 이름을 새긴 인장을 파 준다면, 그 인장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오랜 기간 사용할 인장이니까 그 사람을 잘 표현하고, 사용하는 사람이 인장을 사용할 때마다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씨도 표현 실력도 계속 연마해야 하는 거지요. 평생 공부해야 하는 분야입니다."

인장을 주문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단체의 성격이 어떤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인장인지를 깊이 파악하는 건 그 때문이다. "문자에 의미를 담고, 잘 형상화한 인장을 파고 싶어요. 인장에는 한 사람의 소망과 기원이 담깁니다. 그런 마음까지도 문자로 형상화해내야 합니다"

그의 인장은 TV에 소개된 적도 있다. 2012년 창원KBS 방송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이름교감'에서 추사 김정희의 전각에 대한 내용을 방송했는데, 이 때 사용한 추사의 전각은 그의 모각작품이다. "방송국에서 의뢰가 들어와 작업을 했지요. 이 방송을 어떻게 봤는지 독일에 사는 70대 교포 할머니가 국제전화로 인장 주문을 해온 일이 있었어요. 경기도 출신의 이 할머니는 고향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저한테 연락을 해온 겁니다."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집을 사서 계약하려는 젊은 부부가 와서 사이좋게 부부인장을 주문하고, 사랑을 언약한 선남선녀가 와서 커플인장을 주문한다. 교수와 문인들은 장서인을 파가기도 한단다. "딸아이가 아빠를 돕는다며 네이버에 블로그를 만들었어요. 제목이 '문자의 꿈'이랍니다. 가끔 블로그를 통해 고객의 연락이 오기도 해요. 고맙고 기특한 딸이지요." 그는 홍보를 자처하고 나선 딸을 은근히 자랑했다.

▲ 인장예술가 문개주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빛이 있는 한 빛 가운데로 계속 걸으라'고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제게 가르침을 주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많은 분들 덕분입니다. 그분들 모두가 저의 빛이고, 이 작업 자체가 또 저의 빛입니다. 공부를 계속하면서 아름다운 인장을 새기는 길, 끝까지 걸어가겠습니다."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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