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땀 한 땀 촘촘하게 뜬 바느질이 한 줄로 곧게 이어졌다. 그 줄들이 또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늘어섰다. 누비 한복 한 벌 만드는 데 도대체 얼마만큼의 바느질을 해야 할까. 우리나라 손누비의 특징은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이 지도록 곧고 촘촘하게 홈질로 바느질을 하는 것이다. 방한과 내구성, 실용성이 뛰어난 바느질법이다.  여인들의 정성과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지는 누비옷은 방한·호신·보호·종교·장식용과 실용성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됐다. 우리나라의 기후 풍토로 보아 방한용으로 가장 널리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에서 누비 바느질을 하고 있는 박말희(53) 씨의 '다솔쌈지방'을 찾아가보았다. 

박말희의 작업실 다솔쌈지방은 한림면 가산리 191의 2에 있다. 폐교된 가산분교를 리모델링한 '생태체험학교 참빛'의 교실 하나가 다솔쌈지방이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큰 책상을 이어붙인 작업대부터 눈에 들어왔다. 교실 벽면과 수납함에는 그가 만든 작품들, 누비 한복, 퀼트 용품들이 빼곡했다.

▲ "죽을 때까지 바느질 할 거예요." 누비 한복을 꼭 끌어안은 박말희 씨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진해시 경화동에서 일곱 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엄마가 바느질을 잘 하셨고, 또 좋아하셨죠. 일곱 자매 모두가 엄마를 닮았는지, 바느질하고 수놓는 걸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가정가사 시간과 선생님을 좋아했죠. 중학교 때는 수놓은 보조가방, 고등학교 때는 남자아이 한복 바지를 만들었는데 친구들은 힘들어했지만, 저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바느질을 하면서 한 번도 어렵다,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집에서도 바느질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천에 레이스를 달아서 테이블보도 만들고 전축커버도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가 바느질에 빠져 있는 걸 볼 때면 질색을 하며 '공부는 안 하고 뭐 하느냐'고 야단을 쳤다. 아마 사랑하는 딸이 바느질하며 고생할까봐 혼을 낸 것이리라.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전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에 딴짓 안하고 공부에만 열중했어요."

그는 아버지가 다정다감한 성품이었다며 어릴 적 추억을 들려주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비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리어카를 몰고 학교까지 왔어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우리 자매들을 리어카에 태우고 집까지 데리고 가셨죠. 따뜻한 기억이지요. 아버지는 마음도 넉넉하셨어요. 어머니도요. 아버지는 '동양호'라는 배의 선주였습니다. 선원가족, 동네사람 고루 돌보셨죠. 어머니는 선원 아이들까지 챙기셨고요. 김장을 몇 백 포기씩 해서 선원가족들과 나눠 먹었지요.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법, 그것을 부모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잔누비 치마저고리 한 벌 한달반 걸려도
한땀만 잘못 뜨면 전체가 흐트러져 보여
매순간 고도의 집중력 필요한 작품 활동

중요무형문화재 김해자 누비장 찾아가
전통 기법 통해 예술작품 자긍심 높여
"책 펴내고 바느질 박물관 만들고 싶어요"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생활을 하다가 24세 때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할 때 '바느질을 실컷 하고 살아야지'라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가 부산 덕천동에서 살던 1986년, '데레사 홈패션'을 직접 운영했다. 어느날 아버지가 찾아왔다. '데레사 홈패션'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네가 좋으면 마음 편히 해라." 바느질을 하면서 행복해 하는 딸을 본 아버지가 드디어 허락을 하신 거였다. 그는 '마음껏' 바느질을 하면서 퀼트, 누비, 자수 등 바느질의 영역을 점차 넓혀 나갔다. 그 과정에서 배울 것도 많고, 작품을 만들자니 가게를 운영할 시간이 모자라 '데레사 홈패션'은 접어야 했다.

"곱고 예쁜 천으로 정성껏 바느질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퀼트에 많은 매력을 느꼈죠. 퀼트를 배울 때는 서울, 부산, 울산의 퀼트샵 10여 군데를 찾아다녔어요. 선생님들마다 특기와 개성이 달라서 따로 찾아다니면서 배웠습니다. 선생님들마다 내 솜씨를 칭찬해주셔서 신이 났죠.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어요."


그는 1997년 부산 현대백화점 현대문화센터에서 규방공예를 공부했다. "그때 보자기와 조각보를 만들면서, 바느질을 통해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썼던 조선시대 여인들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전통 바느질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주위에서 그에게 퀼트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서 한복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퀼트 분야에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다솔퀼트'에는 미국, 중국, 프랑스, 일본에 사는 회원들까지 500여 명의 회원이 가입돼 있다. 2012년에는 한국능력개발원으로부터 '다솔퀼트아트스쿨 민간자격증'을 획득, 다수의 퀼트 강사를 배출했다.

규방공예와 한복을 공부하며 열심히 바느질을 하던 그는 잡지에서 누비장 김해자 선생의 기사를 읽었다. 김해자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보유자이다. 그는 2012년부터 경주 탑동의 김해자 선생을 찾아가 전통 손누비를 배웠다.

"김해에서 경주까지 수없이 오가며 김해자 선생님의 지도 아래, 선생님의 동생이며 이수자인 김해연 선생과 함께 누비를 배웠지요. 배냇저고리, 솜누비 풍차바지, 아기두렁치마, 남녀조끼, 버선, 토시, 한복…. 하나하나 작품 제작 과정을 익혔습니다. 선생님께 바느질을 배우면서 전통을 이어가며 예술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도 커져갔고, 선생님을 향한 존경심도 깊어졌습니다. 참고, 노력하고, 인내하는 그 마음을 닮고 싶었습니다."

작업실 한 쪽에는 그가 만든 손누비 한복이 있었다. 홈질한 바느질 땀은 0.1~0.2㎜ 정도로 일정했다. 이 바느질 땀은 마치 일직선을 그은 듯했다. 올을 따라 가며 흐트러짐 없이 바느질한 선이 고왔다. 바느질 선은 0.5cm 정도의 간격으로 가지런하게 한복 전체를 누비고 있었다. 누비 중에서도 잔누비 기법이었다. 조선시대의 <궁중발기>에는 잔누비를 '세누비(細樓緋)'라고도 표기하고 있다. 누비 간격이 0.5cm 내외의 좁은 형태를 말한다. 치마저고리 한 벌을 만드는 데 약 1개월 반이 걸렸단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이 한복만 짓는데 모든 시간을 투자했으니, 그 정도 걸렸어요. 실제로 다른 작업과 겸해서 하면 몇 곱절은 시간이 더 걸리죠."

그에게 혹시 완성된 누비 작품을 다시 보면 잘못된 부분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았다. "한 땀 잘못 뜬 그 부분만 눈에 확 도드라져 보이죠. 퀼트는 잘못된 부분을 고칠 수 있지만, 누비는 잘못된 부분을 다시 고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매순간 정확하게 바느질해야 합니다." 그는 누비의 좋고 나쁨은 우리의 고전미를 얼마나 잘 살렸는지, 한복의 질감과 색감 등 전통미를 잘 살려 표현했는지에 달렸다고 설명했다.

그의 공부는 끝이 없다고 한다. 요즘은 자수를 배우러 일주일에 한 차례씩 서울의 김방자 선생을 찾아간다. 한림의 '다솔쌈지방'은 일주일에 서너 번 찾는다. 작품 준비도 하고, 찾아오는 회원과 수강생들을 위한 수업도 한다.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지난 30여 년간 바느질을 하면서 축적된 자료들을 모아 책도 펴내야 하고, 바느질 박물관도 만들어야 한다. 김해에서 다문화가정 어머니들과 함께 바느질 하는 모임도 꾸려가고 싶다.

▲ "누비는 우리의 고전미와 전통미를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말희 씨가 누비 배냇저고리를 펼쳐 보이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그의 퀼트 작품 중 일부.
"이렇게 인터뷰를 하다 보니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과 아들, 나에게 바느질의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과 하느님, 조영숙 현대한복 원장님, 그리고 일곱 자매 모두들 고맙습니다." 그는 바느질 인생이 너무 행복하다며 누비 한복을 꼭 끌어안았다.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바느질 나라 사람이에요. 죽을 때까지 바느질 할 거예요."

참,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가 직접 쓴 글이라며 '바느질 하는 행복한 삶'이라는 원고를 내밀었다. 이렇게 꼼꼼한 인터뷰이는 처음이었다. 그가 직접 쓴 바느질 인생을 이 지면에 제대로 녹여냈는지 걱정이 앞선다.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