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공예를 처음 배우러 간 날. 기초과정은 작은 접시부터 시작하는 게 일반적인데, 겁도 없이 팔각상부터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팔각상을 완성했다. 그렇게 한지공예를 만난 게 인연이 돼 한지공예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미란(45) 씨의 공방 '예당한지'를 찾아가 보았다.

'예당한지'는 인제대학교 정문 옆 우신아파트 입구 우신상가 안에 있다.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예당한지' 한가운데에는 넓은 작업대가 놓여 있다. 한쪽 벽은 모란장, 육각전등, 팔각상, 반짇고리, 한복함, 동고리 등 다양한 작품들로 빼곡하다. 화려함을 드러내는 작품, 소박하고 담박함을 은은하게 풍기는 작품, 예쁘고 앙증맞은 작품. 김미란의 작품들은 쓰임새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 한지공예가 김미란 씨가 작업대 앞에서 자신의 한지공예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갖가지 색의 한지를 보관하고 있는 보관대도 눈에 띄고, 한지공예체험에 쓰이는 각종 소품들도 보인다. 목단문양도, 책가도(책, 부채, 향로, 도자기 등을 그린 민화) 등의 민화그림액자도 벽에 걸려 있다. 업무책상 옆에는 화조도를 그린 병풍도 세워져 있다. 그가 직접 만든 매듭공예작품도 병풍을 장식하고 있다.

김미란은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동에서 딸 셋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 다 좋아했어요. 순정만화 주인공 그림도 많이 그렸죠. 친구들이 둘러서서 보며 부러워했지만, 저는 숫기가 없어 그걸 뽐내거나 자랑할 줄 몰랐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이모가 '내가 아는 화가가 있는데, 한번 만나러 가보자'며 감탄도 했어요. 그 화가는 못 만났지만요." 그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 금색한지 문양으로 장식한 팔각함(위 사진)과 화려한 목단문양으로 꾸민 서랍장.
처음 배우러 갔을 때 팔각상부터 했죠
할 수 있을까 보다 할 수 있다 생각했고
원하는 작품을 표현해낼 때 기뻤어요
한지 채색으로 분야를 넓히려 합니다

"어릴 때 오른손을 다쳐서 깁스를 한 적이 있어요. 하는 수 없이 왼손을 사용했는데,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데엔 별 어려움이 없더군요. 양손잡이였던거죠. 그래서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좋아했나봐요."

그는 아카시아 줄기로 동생들 머리를 굽실굽실하게 퍼머도 자주 해줬다. 어느 봄날에는 막내를 업고 합성동 제2금강산에 쑥을 캐러갔는데, 그 손끝이 얼마나 야무지고 단정했던지 그가 캔 쑥을 온 동네사람들이 나누어 먹은 적도 있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 혼자 몸으로 집안을 돌보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죠. 집안형편은 어려웠지만 어머니는 우리 세 자매를 키우면서 매 한 번 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가시나' 소리 한 번 안 듣고 자랐어요. 어머니를 보면서, 큰 딸인 제가 당연히 도와드려야 한다고 마음먹었어요. 동생들도 생각해야 했구요. 상업계 학교라도 가고 싶었지만, 일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는 마산 한일합섬 부설여고에 입학했어요. 팔도잔디 한일여고생 마지막 세대인거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그렇게 해서 첫 월급 27만 6천 원을 받아 봉투채로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어린 딸이 고생한다고 어머니가 많이 마음 아파하셨어요."

졸업하고 나서는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한일합섬을 다니면서 틈틈이 '뭔가'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미용학원, 지점토, 홈패션도 배웠다.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배우고 싶었고, 배우면 잘 했고, 재미있었어요. 일과 학업을 함께 해낸 저에게 미안했던지 어머니는 제가 배우고 싶다는 건 모두 허락해주셨어요. 학원비가 꽤 들었을텐데…." 결혼을 한 뒤에는 의류업계에서 일했다. 니트 정장 맞춤전문점, 아동복매장에서 일했을 때 손님들이 그가 사장인 줄 알 정도로 성실하게 일했다.

김해로 온 지는 12년째. 그는 김해로 와서 비로소 한지공예와 처음 만났다. "동네 언니들과 함께 삼안동사무소에서 개설한 주민대상 한지공예강좌를 들었어요.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작은 접시부터 시작하는데, 저는 덜컥 팔각상부터 시작했습니다. 주위에서 다들 놀라워했지요.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어쩐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하니까 되더라구요. 그렇게 동사무소에서 강좌를 듣다 보니 한지공예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만들어진 반제품(종이를 두껍게 압축한 합지나 목재로 기물의 형태를 미리 만들어둔 것)에 한지를 붙이기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어요. 작품 디자인을 하고, 재단하는 것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을 전통방식대로 배우고 싶었어요. 취미가 아니라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부산의 한지공예가 전수곤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김해에서 부산 광복동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매일 4시간 정도 왕복했다. 무거운 재료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전수곤 선생님은 꼼꼼하고 정확한 분이셨어요. 재단부터 직접하고, 문양 파고, 풀도 끓여서 사용하고…. 정석대로 배웠습니다. 과제를 내주시면 밤새는 줄도 모르고 해갔는데, '이건 아니다'라며 다시 해오라고 하셨죠. 그렇게 기본부터 하나씩 다시 배웠습니다. 반제품에 한지를 붙인 것과 전수곤 선생이 직접 재단해서 만든 작품은 달랐습니다. 눈으로 봐도 그 수준 차이가 보이더군요. 선생님 밑에서 배우면서 내가 직접 재단하고 전통방식대로 접시를 만들었습니다. 소품이지만, 처음으로 모든 과정을 직접 했기에 소중한 저의 '첫 작품'입니다. 그 이전에 했던 건 크기가 큰 것이라 해도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이 간직해 둔 자신의 첫 작품, 작은 접시를 내보였다. 그는 합지를 재단할 때 칼날에 손을 베어 크게 다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 밑에서 2년 정도를 그렇게 배우고 나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9년에 '예당한지'를 열었습니다." '예당(禮堂)'은 전수곤 선생이 지어준 호이다. 재주와 예도로 가득한 집이라는 의미이다. "호는 많이 불리면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쁘고 마음에 드는 호라서 공방 이름도 '예당한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공방을 열고 난 뒤에도 민화, 매듭공예, 퀼트, 도자기 등 다른 분야의 공예를 계속 배웠다. 그때마다 매번 전문가를 찾아갔다. 전문가를 찾아 다른 도시로 공부를 하러 가는 것쯤은 즐겨 감수했다. "이왕 배우려면 정석대로 배워야지, 어설픈 취미생활이나 대충하는 건 싫었습니다." 그는 낮에는 배우러 다니고, 밤에는 한지공예 작업을 집중적으로 했다. 그렇게 배웠던 모든 과정들이 그의 작업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 빛을 더해주었다.

전통한지공예의 길을 열심히 걸어온 그는 2012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으로부터 민간자격등록증을 받았다. '예당한지 아트스쿨'이라는 이름의 민간자격관리기관이 된 것이다. 그는 김해한옥체험관을 비롯해 김해 각 시설기관과 단체 등에서 한지공예체험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해시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체험강좌도 한다. 한지나 종이로 만들기를 하면서 손을 움직이는 체험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녹이는 일종의 심리치유 과정이다.

그는 앞으로 한지 채색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그림, 내가 작품에 담고 싶은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한지 채색 작업이지요." 이 과정은 몇 배는 더 공이 드는 작업이다. 기물의 골격에 합지문양(합지에 문양을 판 것)을 먼저 붙인다. 합지문양 부분을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탈색하는 과정을 수차례 거친다. 자연스럽게 탈색이 되면 그 문양 위에 원하는 색의 물감으로 채색을 한다. 그러면 칼로 파낸 문양이지만, 그 날카로운 흔적은 기물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애시당초 문양과 기물이 하나였던 것처럼 보인다. 문양이 절로 도드라진 듯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꽃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연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입니다."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배우고 싶고, 그렇게 배운 것을 한지공예에 녹여내고 있는 김미란. 그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거야!'라는 열정이었다. 

≫ 김미란
한지공예가. 예당한지 아트스쿨 대표. 민간자격등록증 취득(2012.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경남공예품대전 은상(2009), 대한민국 공예예술대전 특별상(2009) 등 공예대전 수상 다수. 경남공예품개발 장려업체 지정(2010~2011). 현재 김해한옥체험관 공예강사·김해시정신건강증진센터 공예강사로 활동 중.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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