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지붕을 하나로 합친 듯한 모양을 한 기비츠신사 본전. 오카야마(일본)=김병찬 기자 kbc@

 

신사 소재 소우자에 가야 옛 지명 남아
메이지정부도 '카야군'으로 편성해 통치
두 개의 지붕 합쳐진 양식 일본의 국보

4~5세기 일본 건너간 한반도 왕자 '우라'
기비츠와 싸운 설화로 '가야의 땅' 추정
부뚜막 신당도 가야 주거시설 전파 방증

 

일본에는 곳곳에 신사(神社)가 있다. 신사는 일본의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사당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본 신사의 이미지는 곱지 않다. 세계 2차 대전의 전범은 물론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한 전범까지 안치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정치 관료들이 참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신사가 무려 8만 5천700여 개나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가야계의 신을 모시는 신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오카야마의 소우자(總社) 시에 있는 기비츠(吉備津)신사와 오사카의 가라쿠니(韓國)신사다.

옛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배를 타고 갈 때 이정표가 됐던 카야산(可也山·365m)과 가야인들의 마을 터로 추정되는 니시진마치(西新町) 유적지가 있는 후쿠오카에서 신칸센 열차에 올랐다. 열차로 3시간가량 달려 오카야마의 기비츠역에 도착했다.

▲ 기비츠신사 입구에 설치돼 있는 모모타로 전설 안내문. 삼국유사에 기록 돼 있는 가야의 건국설화와 내용이 유사하다.

인제대학교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에 따르면 기비츠신사가 있는 소우자 시에는 여기저기에 '카라, 카야, 아라, 아야'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이 지역 사람들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소우자 시 일대를 '카야군'이라 부르고 있다. 8세기 무렵 이 지역을 통치하던 사람들이 카야국조(加夜國造)라는 씨족이었으며, 이 때문에 1879년 메이지정부도 이곳을 '카야군'이라는 이름으로 편성해 통치했기 때문이다.
 
기비츠역에는 기비츠신사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이 일러준 대로 15분 남짓 시골길을 걸으니 기비츠신사 입구가 나왔다.
 
기비츠신사 입구에 흥미로운 내용의 안내문이 설치돼 있었다. 신사가 모시고 있는 주신인 기비츠히코노미코토(吉備津彦命)와 그가 퇴치한 붉은 얼굴의 도깨비 우라(溫羅)에 얽힌 '모모타로 전설'이다. 이 전설에 나오는 우라는 4~5세기께 한반도에서 건너온 왕자라고 일본에 알려져 있는데,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우라가 백제의 왕자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카야국조의 씨족이 통치했으며 가야와 발음이 유사한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우라를 전설의 가야인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모모타로 전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키노성에 살고 있던 우라는 나쁜 짓을 해서 마을주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를 퇴치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한 기비츠는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기비츠는 화살을 쏘아 우라의 왼쪽 눈을 맞혔고, 우라는 꽁무니를 뺐다. 우라가 꿩으로 변해 도망가자 기비츠는 독수리로 변신해 뒤쫓았다. 강가에서 다시 우라가 잉어로 변신하자 기비츠는 가마우지로 변해 쫓아가 끝내 우라를 붙잡아 목을 베었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는 가야의 건국설화에도 모모타로 전설과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가야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 기비츠신사 후문 인근에 있는 부뚜막 신당. 부뚜막이 설치돼 있는 신당 내부는 촬영이 금지돼 있다.

'수로왕 3년, 탈해가 신라의 왕이 되기 전에 가락국의 왕위를 뺏으려 가락에 왔다. 수로왕이 이를 거절하고 탈해와 도술로써 시합을 했다. 탈해가 매로 변하면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었고, 탈해가 참새가 되면 왕은 새매로 변신했다. 결국 탈해가 항복하고 달아나니 수로왕은 탈해를 신라 경계까지 내쫓았다.'
 
과거 카야군으로 불리던 지역의 모모타로 전설과 가야의 설화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은 가야의 문화가 이 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신사 입구에는 손과 입을 물로 씻는 장소인 미타라시가 있다. 일본인들이 신사에 들어서기 전에 꼭 들르는 곳이다. 손을 씻은 뒤 돌계단을 올라 신사로 들어갔다. 신사에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기비츠신사 안내소 직원은 "주말에는 하루 평균 1천 명의 방문객이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비츠신사는 오카야마의 관광 홈페이지에 대표 관광지로 소개돼 있을 만큼 인기가 높다.
 
신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건물은 기비츠가 모셔져 있다는 본전이었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들어서 있는 이 본전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있다. 기비츠신사의 본전은 다른 신사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었다. 관광객들은 본전 앞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지붕 모서리의 끝은 뾰족하고 하늘을 향하고 있었으며, 두 개의 지붕을 한데 합친 듯한 모양이었다. 이런 지붕양식은 일본에서는 오직 기비츠신사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해 기비츠 양식으로 불리고 있었다.
 
본전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기비츠신사의 자랑인 나무지붕이 있는 복도인 회랑이 나왔다. 기비츠신사의 회랑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회랑 처마 끝에는 회랑을 지을 때 기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나무명패들이 붙어 있었다. 본전과 말사를 잇는 이 회랑의 총 길이는 400m에 달했다.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의 건축물이라고 했다.
 
관광객들은 회랑 곳곳에서 사진을 찍거나, 복도 바닥에 앉아 스케치북에 주변 정원의 경치를 그리기도 했다. 규칙적으로 배치된 회랑의 나무기둥은 정원의 경치와 어우러져 단정한 느낌과 함께 여유로운 기분을 안겨줬다.
 
회랑의 끝에는 기비츠신사와 가야의 연관성을 또다시 짐작해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부뚜막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가야인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후쿠오카 니시진 유적에서도 일본 최초의 부뚜막이 발견된 바 있다. 부뚜막은 가야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전파된 주거 시설이다. 신당 안에는 겉이 검게 그을린 부뚜막이 설치돼 있었다. 모모타로 전설에 따르면 기비츠는 우라의 머리를 베어 이 부뚜막 속에 묻었다.

▲ 제를 올리는 장소인 기비츠신사 내부.

신당 내부를 카메라로 찍으려고 하니 신당 직원이 말렸다. 그는 "부뚜막 신을 모시고 있는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신당 안에서는 예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안내문을 뒤늦게 발견했다. 부뚜막 신당은 기비츠신사에서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부뚜막 신당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오후 2시 전까지 기비츠신사 안내소에 3천 엔을 지불하고 신당 안에서 제를 지낼 수 있다. 동시에 길흉화복의 점을 볼 수 있다. 점궤를 보는 방법은 독특하다. 기비츠신사에 상주하는 제주가 가열된 부뚜막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함께 제를 지낸 관광객에게 점궤를 알려준다. 가마 밑에 우라의 목이 묻혀 있기 때문에 부뚜막에서 나오는 소리를 우라의 신음소리로 여긴다는 것이다.
 
회랑을 되돌아 나와 본전 왼편에 있는 기비츠신사 안내소를 찾았다. 하얀 도포를 입고 있는 이곳의 직원에게 "한국어로 된 기비츠신사 안내서가 있느냐"고 물으니 "일본어와 영어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기비츠신사에서 일하는 여러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가야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기비츠신사와 가야의 연관성이 재조명을 받고 한국어로 된 안내서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기비츠신사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방문하기 부담스러운 일본의 신사로 인식되진 않을 듯했다.

김해뉴스 /오카야마(일본)=김명규 기자 kmk@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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