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걸친 4명의 효자 기린 '2세4효비'
임진왜란 4충신 류식의 조부 류용 장군
사헌부 감찰·비변랑 지낸 조강 등 유명
마을회관 자리는 30년 전까지 곡식창고


외동의 빽빽한 아파트 숲을 지나 5분 간 지방도로를 달리다보면 주촌교차로가 나타난다. 주촌교차로에서 주동초등학교 방향으로 향하면 주촌면 원지리 국계마을이 나온다. 국계마을로 가는 길 양편에는 곧거나 굽은 소나무들이 고상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소나무들 사이로 무궁화꽃과 국화꽃이 고개를 내밀며 손님을 맞이한다. 국계마을의 이름은 '국화 국(菊), 시내 계(溪)'를 쓴다. 시냇가에 들국화가 많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 국계마을 효자 4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는 사효각.

국계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에는 어르신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을의 옛 이야기를 듣고싶다는 부탁에 어르신들은 국계마을에서 태어나 70년 이상을 살아온 박주환(78) 씨를 소개했다.

박 씨는 가장 먼저 '사효각(四孝閣)'을 소개했다. 마을회관에서 경운산 방향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사효각이 나온다. 비석에는 '2세4효비(二世四孝碑)'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2대에 걸친 4명의 효자를 기리는 비석이다.

박 씨의 5대 조상인 박상언과 부인 송 씨는 조선 영조 때 밀양에서 국계마을로 이사왔다. 이들은 연로한 아버지를 극진하게 섬겼다. 박 씨 부부의 아들 춘영, 춘혁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부모가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키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 이들의 효성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철종 때인 1816년 사효각이 세워졌다.

경운산 끝자락에 놓인 국계마을은 예로부터 명당이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이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4명의 충신 중 한 명인 류식(1552~1592)의 조부 류용(1451~1514) 장군의 묘소가 있다. 류 장군은 조선시대 성종 때인 1483년 무과시험에 2등으로 급제해 조선시대 중앙군인 오위도총부 도사, 제주판관 등을 지냈다. 또한 조강(1622~1666)의 묘도 마을 입구 소나무 숲 안에 있다. 그는 효종 때인 1651년 무과에 급제해 오늘날 검찰과 같은 사헌부 감찰, 군의 기밀을 책임지던 비변랑 등을 지낸 인물이다.

박 씨의 어린 시절 주촌면에는 주촌초등학교 밖에 없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금은산 봉우리 하나를 넘어 3㎞ 거리를 걸어다녀야만 했다. 그는 "어릴 때 힘든 것이 어디 있었겠나? 학교 가는 길이 즐거워 맨날 산봉우리 하나를 뛰어다녔다"며 웃었다.

마을 뒷산에는 국계대저수지를 비롯한 3개의 저수지가 있다. 물이 풍부했던 덕분에 벼농사가 잘 됐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가끔 가뭄이 들 때면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정명순(75·여) 씨는 "주로 벼농사와 보리농사를 지었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 물이 마르면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농사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보니 다들 김해 시내로 나가 품앗이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매일 수제비나 국수를 만들어먹었다"며 어려웠던 옛 시절 이야기를 했다.

국계마을 사람들은 벼농사나 보리농사로 돈을 벌고 밭에 고추나 오이 등을 심어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주촌면에는 시장이 서지 않아 마을주민들은 장을 보기 위해 부원동까지 나와야 했다.

현재 마을회관이 들어선 자리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곡식창고였다. 팔고 남은 쌀이나 보리는 이곳에 저장했다. 배정자(75·여) 씨는 "농기계가 없던 시절에 5월 모내기철이 되면 한 달 내내 모내기를 했다. 일손이 모자라다보니 어제는 우리 집 논, 다음날은 옆집 논 이렇게 마을주민들이 서로를 도와가며 농사일을 했다"고 말했다.

▲ 주촌면 국계마을 한가운데로 흐르는 개울. 30~40년 전에는 여기서 동네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곤 했다.

30~40년 전만 해도 마을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아낙네들은 아침이면 빨래하기 위해 마을 시냇가에 모여 도란도란 수다 꽃을 피웠다. 정 씨는 "겨울에는 빨랫감 옆에 대야에 펄펄 끓인 물을 담아놓고 빨래를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 때문에 지독하게 손이 시렸다. 그럴 때면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에 손을 넣어 데워가며 빨래를 했다"고 회상했다.

국계마을은 주촌면의 다른 마을에 비해 공장이 적은 편이다. 그래도 마을의 풍경은 많이 변했다. 이 때문에 마을 어르신들은 한숨만 푹푹 내쉰다. 정 씨는 "30년 전에는 마을 당산나무 터에 풀이 자랄 틈이 없었다. 그곳은 아이들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공도 차고 비료포대로 썰매도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까르르 웃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 했던 옛 마을의 모습이 그립다"고 아쉬워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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