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헌정사에서 대통령의 유고에 따라 국무총리가 그 직을 대행한 경우는 두 번이다. 1979년 '10·26 사태'로 서거한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은 최규하 국무총리와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의결로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 고건 총리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는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판결이 남에 따라 고건 총리는 총리자리로 돌아왔으나, 최규하 국무총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2·12와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으며 9개월의 짧았던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본관이 강릉으로 강릉최씨이며, 자는 서옥(瑞玉), 호는 현석(玄石)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선비정신을 일찍이 숙지했고,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사대 조교수가 된다. 이후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이라는 직함의 공무원이 되고, 정부수립 후 당시 변영태 외무부장관의 눈에 들어 외무부 통상국장이 된다. 외무부 대사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국무총리로서는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재임했다. 1980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후 26년을 침묵했고 2006년 사망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태음인으로 생각된다. 태음인의 타고난 재주는 '인륜'이라고 했다. 인륜은 기억력과 배려가 좋다는 뜻이다. 겪은 것을 잘 기억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능력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비망록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전두환 대통령은 "메모를 잘하는 분이니 무엇이든 메모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태음인의 인륜은 구체적인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인데, 최규하 대통령의 경우 메모가 해당된다. 30여 년을 거주한 마포구 서교동 467-5의 최규하 대통령 가옥을 보면 달력을 잘라 만든 메모지가 눈에 띈다. 지나간 달력을 오려서 메모지로 사용한 것에서 검소함과 동시에 태음인의 인륜을 느낄 수 있다.
 
태음인은 '치심(侈心)'을 절제해야 한다고 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 자기가 먼저 대접받고 싶은 조급함이 앞설 때 생기는 마음이 치심이다. 치심은 실제보다 크고 많은 듯 허세를 부리는 마음이다. 치심의 절제는 검소함이기도 하다. 최규하 가옥에서는 치심이 절제된 최규하 대통령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1953년 구입한 선풍기, 꿰매어 쓴 보료, 40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장식장. 다만 태음인은 선천적으로 간대폐소한 체질이라 담배가 특히 몸에 해로울 수 있다. 최규하 대통령은 애연가였다고 한다. 담배는 폐의 기능을 허하게 한다. 교심과 치심이 절제되어 기운 좋은 태음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담배는 유일한 오점이 아닐는지.
 
<동의수세보원>에 남겨진 처방 중에 보폐원탕이라는 게 있다. 의학입문에 수록된 생맥산이라는 처방의 변방이다. 생맥산은 인삼·맥문동·오미자 세가지 약물로 구성되나, 소음인 약재인 인삼을 빼고 길경을 넣어서 구성한 것이 태음인 보폐원탕이다. 애연가였던 최규하 대통령의 경우에는 보폐원탕을 떠올려 보았다. 산약·의이인·나복자를 가감하여 처방한다면 간의 기운도 소통하는 묘가 생기는데,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1980년 '서울의 봄'도 보폐원탕으로 견뎠으면 조금 편하게 이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김해뉴스 /이현효 활천경희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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