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소년은 도자기 요에서 장작 패는 일을 했다. 소년은 어느 날  창문 너머로 발물레를 돌리며 도자기를 빚는 사람들을 보았다. 소년은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그 짧은 한 순간이 소년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조선 차사발을 만드는 임만재(46)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임만재의 '정호가마'를 찾아가보았다.

▲ 임만재의 차사발 작품
조선 차사발을 향한 지난날의 열정들
죄다 부수고 버리고서야 얻은 깨달음
손은 더 부지런히, 눈은 더 높이 …

전통의 기본 틀은 깨뜨릴 수 없는 것
다만 나만의 차사발을 만들고 싶을 뿐
완성이 있겠는가, 그저 꿈을 가져갈 뿐


'정호가마'는 한림면 퇴래리 572-2에 있다. 시골집을 사서 작업장 한 채, 전시장 겸 다실 한 채, 살림집 한 채로 개조했다. 그리고 전통가마를 지었다. 이곳에 정호가마가 자리 잡은 지는 17년째이다. 다실로 올라서는 마루 옆에는 작은 화단이 있다. 아직도 시골집의 향취가 남아 있다.

임만재는 1970년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는데, 산촌이라 밭이 많았죠. 겨울에 나무하러 다니고, 여름에 소 풀 뜯어 먹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주변에서 언제 적 이야기냐며 안 믿어요. 그 마을에서 14세가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밭농사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었으니, 동네사람들도 일가들도 하나씩 도회지로 떠나나갔습니다. 마을을 떠난다는 건 서울 아니면 경상도였죠. 형도 김해에서 직장생활을 했어요. 어느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군요. '우리도 가자!'라고요."

그는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을 마치고 미리 김해의 형에게 와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오기로 했던  가족의 이사가 늦어졌다. 그 와중에 중학교에 입학할 날은 다가왔고, 결국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당시 나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몸이 좋았어요. 어느날 형이 일이라도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그래도 몸이 좋으니까 장작 패는 일이 어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김해요업에 들어가 가마에 쓸 장작을 패기 시작했습니다."

진례에 있었던 김해요업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요였다. 김해요업에서 만든 도자기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당시 김해요업에는 물레를 돌리는 대장이 10명,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직원들이 40명에 달했던 큰 회사였다.

"장작 패는 일을 한 지 일주일쯤 지나 작업장 창문 너머로 물레를 돌리면서 도자기를 빚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작업장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바라만 보았는데, 그 순간 확 반해버리고 말았죠. 물레작업을 본 뒤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에서 물레가 돌아갔어요." 옛 일을 들려주는 그의 눈빛이 아스라해졌다. 소년시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것일까.

"얼마 후 가족이 김해로 이사를 왔어요. 아버지는 저를 중학교에 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물레작업에 마음을 빼앗긴 저는 학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안가고 물레를 돌리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많이 맞았습니다. 그때 아버지 말씀 듣고 학교를 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며 웃었다.

▲ "지금껏 만든 차사발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냐구요? 그저 꿈을 좇을 뿐이죠." 임만재 도예가에게 차사발은 완성하고 싶은 대상이자 영원히 꿈꾸며 함께할 친구 같은 존재이다. 그는 그 꿈을 향해 오늘도 작업실에서 흙 만지는 일에 온 열정을 쏟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운명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을까. 그는 중학교가 아닌 물레작업을 선택해 김해요업에서 4년여 일했다. "가마에 불을 땔 장작 패고, 흙을 고르고… 4년 정도 일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요."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 중에 열다섯 살에 장작 패는 일부터 시작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해요업에서 보고 배운 많은 것들이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쟁이 기질'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일이었어요. 지금까지 그 모든 것들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토광도예의 배종태 선생님께도 2년 정도 배웠지요." 

그는 스무 살 때 처음으로 가스 가마를 시작해 2년 정도 작업을 했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하이고, 이래가지고는 안 된다, 좀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30세가 넘을 때까지 그는 진례, 기장, 마산, 밀양 등 영남지역의 요를 두루 떠돌아다녔다. "물레작업을 하는 요를 찾아다녔어요. 먹고 자고 일하고 일 배우고 도와주고…. 임금이요? 물레작업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닌걸요." 알음알음으로 그렇게 여러 곳의 요를 찾아다녔던 그 기간은 일종의 수행기간이었다.

그는 부산의 한 요에서 옹기대장으로 있을 때, 도자기를 배우러 온 한 여인을 만나 25세에 결혼을 했다. 동상동에 집을 구해 7년 정도 살다가 한림으로 옮겼다. 현재의 정호가마이다.

"아내와 함께 작업장을 만들고 장작가마를 지었습니다. 지금의 작업장 자리에 허물어져가는 작은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걸 4일 동안 혼자서 해체했어요. 흙을 리어카에 싣고 언덕을 올라가 땅을 메우고 돋우어 가마도 지었어요. 그땐 힘든 줄도 모르고 너무 좋아서 펄펄 날았어요. 내 작업장에서 차사발을 만들 수 있다는 기쁨으로 꽉 차 있었으니까요."

▲ 임만재의 작업공간인 정호가마의 다실.

가마 이름은 '정호(井戶)가마'라고 지었다. 정호는 조선시대 차사발의 이름이다.

그가 처음 조선 차사발을 만난 건 여러 곳의 요를 찾아다니며 일을 하던 23세 때였다. "어느날 주인이 '이게 조선 차사발이다. 한번 만들어봐라'며 차사발을 주셨어요. 오래된 골동품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명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성형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만들려니 못 만들겠더군요. '내가 눈으로 보고도 못 만드는 그릇이 있구나' 싶었죠. 그때부터 차사발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차사발은 형태와 질감이 모두 중요한데, 처음에는 형태조차 제대로 못 뽑아내겠더군요. 형태만이라도 똑같이 만들어보자 마음을 다잡았죠. 실물로도 보고, 책으로도 보면서 계속 연구를 했습니다. 겨우 형태를 만들었다 싶으면, 이번에는 질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 가장 중요한 게 흙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남의 집에서 할 일이 아니라, 내 작업장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호가마를 짓고 난 뒤 본격적으로 차사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차사발만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애가 탔지요." 흙을 찾고 유약을 찾는 일도 중요했고, 사발을 빚는 일도 중요했다. "새벽 2시 전에는 자본 적이 없었어요. 작업실을 떠나면 불안했습니다. 흙을 찾아나서는 것 말고는 늘 작업실에 있었지요."

그가 흙을 찾아다닐 때 함께 다녔던 이가 있었으니, 처남이다. "회사원이었던 처남은 일요일이면 작업실에 와 일도 도와주고 도자기도 만들었는데 어느새 도자기에 빠져들어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저와 함께 일했습니다. 둘이서 1t 트럭을 몰고 흙을 찾아 전라도, 경기도, 충청도 등지를 돌아다녔어요. 한마디로 흙에 미쳐있었지요." 그렇게 흙을 찾아내 작업을 하고 한 달에 한번 꼴로 장작가마에 불을 땠다. "실험하고, 연습하고, 만들고… 미친 듯이 작업을 했어요. 공모전에서는 몇 번이나 떨어졌어요. 보완하고, 또 보완하고. 그렇게 해서 대상을 여러 번 받았지요." 

그는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조선 차사발 전시회를 보고 왔다. "일본에 있는 조선 차사발 48개를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 전시를 보고 난 뒤 지금까지 내가 만든 걸 모두 부수고 싶었어요. 조선 차사발을 재현했다는 말은 차사발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심스러운 말이고 무서운 말입니다. 조선시대와 지금은 흙과 물과 사람과 세월이 다릅니다. 똑같이 만들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저는 포기가 아니라 다시 배우고 왔습니다.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내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그는 한 달 전 즈음 지난 시절 모든 작업의 결과물을 정리했다. 차사발을 모두 깨부수어 50㎏짜리 부대에 담아 몇 자루를 내다 버린 것이다. "부수어 버리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습니다. 작업을 하려면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다시 만들어야죠. 손은 더 부지런히 놀리고, 보는 눈은 더 높아져야 합니다."

그는 조선 차사발의 기본 틀을 가지고 가되, 자신만의 차사발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사발의 색상, 매화피 형태(사발의 굽 주변에 맺힌 매화꽃 모양의 유약 방울. 사발의 대표적인 매력이다), 빙열(사발을 구울 때 흙이 수축되면서 사발표면에 생겨나는 금. 조선 차사발의 빙열은 작은 동그라미 형태다), 굽의 높이, 그릇의 크기 등은 그대로 가지고 가야죠. 그러면서 나의 차사발을 만들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조선 차사발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임만재가 차사발에 빠져 살아온 이야기에 푹 빠져 있던 기자는 인터뷰가 끝날 즈음 바보 같은 질문을 해버렸다. 지금까지 만든 차사발 중에서 마음에 든 작품이 있었느냐고.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완성이 있겠습니까? 차사발은 평생을 함께 갈 친구이자, 나의 꿈입니다."

≫ 임만재
김해도예가협회 회원. 정호가마 운영. 제2회 전국차도구공모전 대상(2004), 제5회 전국찻사발공모전 대상(2008), 제3회 경남찻사발공모전 으뜸상(2008), 제4회 국제다구디자인공모전 대상(2009), 제3회 한국명다기품평대회 대상(2010) 등 공모전 수상 다수. 개인전 '길을 묻다'(2006, 창원 성산아트홀), '내 마음을 담은 찻그릇'(2011, 서울 인사동 통인갤러리). 그룹전 국제차문화대전(2003~2004, 서울 코엑스) 등 다수.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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