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수렵채집생활을 벗어나 농사를 기반으로 한 정착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장 중요하고 필요했던 기물은 식량을 담아두고, 식수를 담을 수 있는 것 즉, 용기였다. 인류는 처음에는 구덩이, 풀, 나무 등을 이용하다가 흙을 물에 개어 그릇의 형태로 만들어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흙그릇이 불에 타고 나면 더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안 뒤론 토기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이다. 역사인류학자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 어쨌든, 오늘날에도 건재한 '옹기(甕器)'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옹기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하는 필수 생활용품이었다. 여기에서 옹기는 진흙으로 만드는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특히 우리 선조들은 옹기를 조미료와 주식·부식물의 저장용구, 주류 발효 도구, 음료수 저장 용구 등으로 사용해 왔다. 삼국시대 때부터 선조들이 만들어 온 옹기는 전 세계에서 한민족만이 보유하고 있는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이다.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도 도기소와 옹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옹기는 조선시대의 옹기가 이어져 온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옹기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용기들이 등장하자, 문화부에서는 전통옹기를 보호하기 위해 1990년 옹기장(옹기 만드는 기술자)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했다. 김해에서 옹기를 만들고 있는 홍순탁(44) 씨의 '몽탄옹기'를 찾아가 보았다. 

▲ 타래미를 붙여 올려 타림질을 하고 있는 홍순탁 씨.
고향 김해 떠나 몽탄으로 간 아버지
50년 넘게 몽강리서 조선 옹기 제작
고교 때 찾아갔다가 옹기 인생 시작

고령토와 땔감 풍부했던 몽강리
영산강 뱃길 편리해 도요지 역사 유구
1960년대 석정포에 장사꾼 문전성시

4년 전 작업하기 좋은 곳 찾아 진례행
"옹기는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 같아"


홍순탁의 '몽탄옹기'는 진례면 송정리 472-1에 있다. 앞마당에는 완성된 크고 작은 옹기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비를 맞은 옹기는 늦여름 오후의 햇살을 튕겨내며 빛나고 있었다. 집 안마당에는 성형을 끝낸 옹기가 건조 중이었다. 안마당 오른편에 널찍한 작업장이 있었다. 홍순탁은 한창 발물레를 돌리며 옹기를 빚어 올리고 있었다. 작업장이 그리 밝진 않았다. 홍순탁을 소개해준 소목장 소국일 씨가 "조금 어두워야 더 잘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물레는 작업장 입구 바로 옆에 있었다. 자연 빛이 가장 좋은 조명이라는 말일까.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인사를 나눈 뒤 홍순탁이 한 첫마디이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꼭 필요한 말만 했다. 그는 진례에서 태어났다. 부친 홍영수 씨는 옹기장이였다. 그래서 그의 어린 시절은 진흙을 만지고 노는 게 일상이었다.

부친은 전남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로 이주해 50년이 넘도록 옹기를 만들다가 77세에 작고했다. 몽강리는 조선시대 때부터 옹기를 빚어온 마을이었고, 이 마을에서 만든 옹기는 '몽탄옹기'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알려져 있었다.

홍순탁은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아버지를 찾아 몽강리로 갔는데, 그때부터 옹기를 만들게 됐다. 홍순탁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옹기를 빚고 있더라"고 말했다.

홍순탁은 아버지의 대를 잇는 몽탄옹기의 마지막 기능보유자이다. 여기에서 몽탄옹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몽탄옹기의 생산지인 몽탄면 몽강리는 고령토와 땔감이 풍부한 땅이다. 또한 영산강 뱃길이 편리해 삼국시대 때부터 옹기와 질그릇뿐만 아니라 백자와 분청사기 등을 만들어 오던 도요지이다. 그 역사가 이어져 온 몽강리는 90여 가구가 4개의 대형 가마와 7개의 공방을 운영하며 옹기를 제작해 온 옹기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는 김장독, 간장항아리, 물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의 질그릇을 만들었다. 특히 목포의 향토기업인 삼학소주의 소주독을 제작한 옹기마을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에는 마을 앞 영산강 석정포에서 돛단배에 옹기를 싣고 전국 각지로 나서던 장사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홍순탁의 부친 홍영수 씨는 50년 넘게 몽강리에 터를 잡고 옹기를 제작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었다. 홍순탁이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런데, 4년 전 홍순탁이 진례로 옮겨오면서 몽탄옹기의 생산이 중단돼 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다. 무안군에서 그의 진례 이주를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는 당시 언론 보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진례가 고향이라서 돌아온 것이냐고 물었다. 홍순탁은 "작업하기에 좀 더 나은 곳을 찾아서,  그리고 아는 사람들이 몇 있어서"라고 답했다. 그는 "진례가 예전에는 옹기를 많이 만든 지역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가장 늦게까지 옹기를 만들어낸 곳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말을 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가게가 있는 것처럼, 예전에는 마을에 옹기를 굽는 사람이 있었다. 생활에서 사용되는 각종 그릇을 만들어내는 옹기장이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 혼자서 몽탄옹기를 만들었을 때 "아버지 것만 못하다"는 말도 더러 들었다. 부친의 것을 뛰어넘는 옹기를 만들고 싶지 않느냐고 질문해 보았다. 그는 "내가 어떻게 세월을 따라잡겠느냐. 아버지는 전 생애를 바쳐 60평생 옹기를 빚었던 분이다. 내가 미치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 건 당연하다. 나는 그냥 옹기를 만들 뿐이다. 아버지가 사업자등록을 하느라 썼던 이름 '몽탄옹기'를 그래서 그대로 사용한다"고 답했다.

▲ "더 잘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그 욕심을 안 내려고 합니다. 욕심을 내면 지칩니다. 그저 묵묵히 옹기를 만들 뿐입니다." 건조 중인 옹기 앞에 서 있는 홍순탁 씨.
그는 "언제부터인가 물레에 앉아 옹기를 만들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내 천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옹기를 만드는 일이 싫지는 않다. 그냥 자연스러운 습관이 돼서랄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서 만들고 있다. 숨 쉬는 것과 비슷하다. 밥벌이가 되니까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욕심이 없는 것일까. "더 잘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그 욕심을 안 내려고 한다. 욕심을 내면 내가 지친다"는 그는 "가마에서 구워낸 옹기를 보면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그런 내가 옹기에 대해서 말한다는 건 가식이다. 옹기의 좋은 점을 내가 직접 말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우리 정서에 맞으니까 옹기를 찾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저 옹기를 만들 뿐"이라고 밝혔다. 욕심 없이 묵묵히 옹기를 만들고 있을 뿐이라는 그이지만, 그를 찾아 광주와 문경에서 옹기 제작을 배우러 온 제자가 두 명 있다.

그는 오전 6시 반이면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7시면 물레 앞에 앉아 오후 7시까지 작업을 한다. 하루 꼬박 작업하면 다섯 말 옹기 8개 정도를 만든다. 가스가마를 사용하는데,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옹기를 구워낸다. 그는 "유약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이지, 전통가마나 가스가마나 똑같다"고 설명했다.

그가 매일 앉는 물레 위에는 부드레가 달려있다. 부드레는 옹기 같은 큰 그릇을 만들 때 안쪽을 말리기 위해 숯불을 담아 드리우는 그릇이다. 옹기를 만들 때는 반죽한 진흙을 길쭉한 판자모양으로 만든 '타래미'를 한 장 한 장 붙여 올라가며 넓적한 방망이로 타림질(다듬는 일) 한다. 이 때 옹기는 큰 그릇이므로 처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드레에 달린 숯불로 말려가며 작업을 한다. 부드레는 숯불의 위치를 조절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지금은 숯불이 아니라 열을 내는 작은 기구를 매달아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성형한 옹기가 마르고 나면 황토와 재를 1대 2 비율로 섞어 만든 유약에 담근다. 큰 옹기를 두 사람이 함께 맞잡고 작업해야 한다. 옹기는 도자기와 달리 한번만 구워낸다.

옹기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멋을 부릴 수 없으니 더 어렵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섬세한 기법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부분 부분의 작업이 말할 수 없이 섬세하게 이루어진다. 섬세하게 만들었다는 그 표시조차 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옹기이다. 그는 "원래 치장이 화려하면 본래의 아름다움이 훼손된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옆에서 지켜보던 소국일 씨가 "옹기에 작은 국화잎 한 장 그려 넣은 것이 몽탄옹기의 유일한 표식"이라고 일러줬다.

▲ 몽탄옹기 앞 마당에 늘어서 있는 완성된 옹기들.

홍순탁은 "많은 걸 기계로 만드는 세상이다. 이걸 능가하려면 사람의 솜씨가 앞서가야 하는데…. 밥벌이가 되고 있으니 옹기를 만들고 있지만,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털어놓았다. "이것을, 옹기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수록 어렵고 잘 모르겠다."

돌아서 나올 즈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찾아가서 들을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독자들에게 옹기장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기자 역시 욕심을 내지 말고 몇 번이고 발걸음을 해서 자연스럽게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야겠구나, 하는.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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