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단에서 바라본 스진천황릉 전경. 봉분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처럼 느껴진다. 오사카(일본)=김병찬 기자 kbc@


일본 최고 역사책 '고사기'에 기록 남아
철 바탕 가야·불교문화 수용 전해져
능 전체 세로 375m·가로 215m 규모

일본 3대 신궁 중 하나인 '이세신궁'
가야계 신 '가라카미' 내궁 본당에 모셔
부뚜막·철의 신으로 전해 가야의 흔적


일본 열도에 남아있는 가야의 흔적을 찾아 후쿠오카의 카야산(可也山)과 니시진마치(西新町) 유적, 오카야마의 기비츠(吉備津) 신사와 오사카의 가라쿠니(辛國) 신사를 차례로 둘러봤다. 그리고 어느덧 마지막 여정만이 남았다. 이번에는 가야와 연관성이 있는 일본의 천황과 일본 황실의 신을 만나러 간다.
 
■ 가야계의 왕 스진 천황

▲ 스진천황릉의 실측도.

고대 일본의 천황(왕) 중에는 가야계의 인물로 짐작되는 이가 있다. 바로 일본의 10번째 천황인 스진(崇神)이다. 일본 천황이 가야인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스진천황이 가야의 인물이라는 주장은 과거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을 통해 자주 언급됐다. 일본학계에서는 이 주장으로 큰 파장이 일기도 했다. 이는 일본 역사의 정통성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야, 백제의 문화가 일본의 건국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양국 학자들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스진천황이 가야씨족이라는 주장과 그 근거는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집필한 일본역사 관련 서적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스진천황이 잠들어 있는 무덤은 오사카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20여㎞ 떨어진 사쿠라이(櫻井) 시에 위치해 있다. 오사카 기차역에서 긴데쓰선 열차와 JR사쿠라이선 열차를 타고 1시간 40분을 이동해 야나기모토역에 도착한 뒤 15분가량 걸으면 스진천황릉에 도착한다. 항공사진이나 지도로 스진천황릉을 살펴보면 마치 열쇠구멍처럼 생겼다.
 
스진천황릉을 보면 그 크기에 입이 딱 벌어진다. 한눈에 능이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스진천황릉은 물이 가득 차 있는 연못 안에 봉분이 올라와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능의 세로 길이는 375m, 가로 길이는 215m다. 봉분의 지름은 자그마치 158m나 된다. 무덤이라기보다는 흡사 호수 위에 떠있는 작은 섬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적절할 듯하다. 고대 일본인들은 이 왕의 무덤을 왜 이렇게도 크게 만들었을까. 스진천황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스진천황이 일본의 첫 실존 왕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1~9대 천황은 신화 속의 인물이며 실존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말이다. 또 역사학자들은 스진천황이 가야와 일본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3세기부터 4세기 초기의 왕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고사기(古事記)>에도 스진천황은 '처음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라는 설명과 함께 무인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스진천황이 서기 318년 또는 258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스진천황은 철을 바탕으로 한 가야문화와 불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일본을 발전시킨 왕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스진천황이 가야씨족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일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일본 건국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 중에 '기마민족 정복설'이 있다. 3~4세기 한반도에서 건너온 북방민족이 일본을 정복해 일본 왕조를 건설했다는 설이다. 이 학설은 도쿄대학교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 등이 주장했다. 에가미 교수 등은 '일본 선조는 스진천황이다. 가락(가야)에서 북규슈에 걸쳐 야마토 조정에 이르기까지가 일본의 첫 왕조다. 다시 말해 스진천황은 가락의 왕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측면에서 본 스진천황릉.

실제로 <고사기>에서는 스진천황을 '미마키이리히코(任那城入彦)'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 '任那(임나)'는 '임금의 나라'라는 뜻으로,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에는 임나가 가야를 뜻하는 단어로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임나는 '임나가라'의 줄임말, 즉 금관가야를 뜻한다.
 
스진천황릉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무덤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스진천황릉 입구에서 100m가량 걸으니 돌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오르니 1m 높이의 검은 철문이 이어졌다. 철문 밖에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에는 가라쿠니 신사에서도 본 적이 있는 나무문인 토리이(鳥居)가 서 있었다. 제단에서 60m 떨어진 곳에 스진천황의 무덤이 물 위에 떠 있었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무덤 위에 하얀 새 수십 마리가 앉아 울고 있었다. 마치 새들이 스진천황에게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알리고 있는 듯했다. 제단 양쪽에는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길은 능의 가장자리를 둘러 이어져 있었다. 봉분으로 들어가는 길과 연결돼 있다고 한다. 봉분 내부로 이어진 길은 왕릉 북쪽에 2곳, 남쪽에 1곳이 있다.
 
하지만 철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길을 따라가서 무덤 안으로 들어 가보고 싶었지만 재단 밖에서 무덤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면 아마 숲 속에 있는 느낌을 받을 것 같았다. 무덤 안에 가야와의 연관성을 설명해줄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진천황릉을 뒤로 하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 이세신궁에 잠든 가야의 신
일본 미에(三重) 현 동부 이세(伊勢) 시에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은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러야 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이곳은 일본의 3대 신궁 중 하나이다. 이세신궁은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본 황실의 조상신으로 섬겨지는 아마테라쓰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아마테라쓰오오카미는 일본인들에게는 만물을 비추는 태양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8백만 신들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마테라쓰오오카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전범으로 알려져 있는 일본 덴노 가의 시조신이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방문하기에는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세신궁으로 가기 위해 오사카에서 열차를 타고 이세를 방문했다. 이세신궁의 신들 중에 가야계의 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만으로도 가야와의 관련성을 짐작케 하는 가라카미(韓神)다. 가라카미는 헤이안 시대까지만 해도 황실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일본문덕천황실록>과 <일본삼대실록>에는 음력의 2월과 11월 축(丑)의 날에는 가라카미의 제사가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기록돼 있다.

 

▲ 비가 내렸지만 이세신궁은 찾는 참배객들로 북적인다.

이세신궁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신궁의 전체 면적은 무려 5천500ha(5천500만㎡·1천663만 평)이다. 이세의 3분의 1이 신궁이라고 한다. 이세신궁은 크게 외궁과 내궁으로 나뉜다. 이 외에도 별궁 14개, 말사(末社) 24개, 섭사(攝社) 소관사(所管社) 등 모두 125개 사(社)로 이뤄져 있다. 다 둘러보려면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다. 내궁 입구 주변에는 음식점과 기념품점 등이 늘어서 있다. 일본 최대의 관광지이기도 해서 연간 600만 명이 넘는 참배객들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가라카미가 모셔져 있는 이세신궁의 내궁은 역사에서 5㎞ 정도 떨어져 있어 버스를 타고 20분가량 이동해야 했다. 내궁 입구에는 '이스즈가와'라 불리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이 세속과 성역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한다고 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우지'라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일본인들은 모두 우측통행으로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면 손과 입을 씻는 곳인 '죠즈샤'가 나온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들른 뒤 내궁으로 향했다.
 

▲ 큰 나무 숲 사이로 난 본당으로 가는 또 다른 길.

가라카미는 내궁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본당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본당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이 때문에 참배객들은 본당 입구에서 참배를 했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본당 입구에는 수많은 참배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사람들은 본당 입구 문 앞에 걸려 있는 흰 천에 동전이나 지폐를 놓은 뒤 그 자리에서 기도를 했다.
 
자리를 옮겨 이세신궁 안내소를 방문했다. 안내소에는 기념품을 팔고 있어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댔다. 이세신궁의 직원에게 가라카미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 신이 황실의 수호신이기 때문에 본당에 모셔져 있다는 것 외에는 상세히 알지 못했다. 한국, 가야 이야기도 꺼냈으나,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세신궁에 한반도의 신이 모셔져 있다는 사실은 일본인들에게는 낯선 이야기일 뿐이다. 일본의 일부 역사학자만이 가라카미가 한반도와 관련돼 있는 신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들도 대부분 "가라카미는 백제계의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는 가라카미에 대해 "부뚜막 신이라고도 하고, 철을 비롯한 금속자원의 채굴에도 도움을 준 신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보다는 가야와의 관련성이 더욱 깊다"고 설명했다.
 
이세신궁을 빠져나오면서 짧았던 '일본 속의 가야' 취재 여행을 돌이켜보았다. 한국과 일본 역사학자들의 무관심의 그늘에 묻혀 있는 역사가 너무 아쉽게만 느껴졌다. 일본의 건국, 발전의 과정 속에 깊숙이 스며든 가야의 흔적이 두 나라 역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질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보며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김해뉴스 /오사카(일본)=김명규 기자 kmk@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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