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중앙에 구지봉이 보인다. 김해의 첫 하늘은 이 구지봉에서 열렸다.

가야 이전 시대 이끌던 아홉 촌장
수로왕 탄강 빌며 맞이하던 장소
처음으로 덩어리 이뤄 국가 세워

김해의 첫 하늘은 구지봉에서 열렸다. 새 나라 세우려는 수로왕의 목소리가 처음 들렸던 곳이 구지봉의 하늘이었고, 붉은 줄에 달린 금색 상자 속 여섯 황금 알 중 가장 큰 모습으로 첫발을 디뎠던 곳도 구지봉이었다. 수로왕의 탄강을 빌고 수로왕을 맞이하던 구간(九干), 그러니까 아홉 촌장과 그들의 인민이 이미 있었기에 수로왕이 김해에 살았던 첫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 나라를 세웠고 이때부터 김해가 비로소 하나의 덩어리로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구지봉에서 김해의 하늘이 열렸다 함이 과장이 될 수는 없다.
 
오늘은 이 구지봉 일대를 걸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뜸 구지봉으로 향하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 <삼국유사>가락국기는 구지봉(龜旨峰)에 대해 '거북이가 머리를 앞으로 내민 형상이다'라 했는데, 이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 바로 구지봉이다. 그러나 머리가 있으면 몸통도 있기 마련이고, 혼자 돌출한 봉우리도 아니기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 내려오는 능선 윗쪽부터 발걸음을 시작하는 게 순서일 듯 싶고,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향하는 발걸음이 쉬울 거라는 유혹도 뿌리칠 수 없어, 거북이 몸통쯤에 해당할 것 같은 구산동백운대고분에서부터 발길을 시작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동상동 롯데캐슬가야 건너편이라 하면 찾기 쉽고, 활천고개에서 구산동 쪽으로 가야로를 달리다 구산터널을 마주하면서 왼쪽으로 보면 봉긋하게 솟은 둥근 마운드가 보이는데, 이곳이 구산동백운대고분이다. 여기에 오르면 김해 시가지 전체가 손에 잡힐 듯 들어오는 전망이 일품이다. 분산의 만장대까지 오를 시간이 없는 답사객에게 김해의 전경을 보여주며 설명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지금은 잔디로 단장되고 하늘이 열린 시원한 쌈지공원으로 정비되었지만, 여기까지의 사연은 중복된 이름만큼이나 복잡하다. 원래 지난 1963년에 국가 사적 제75호로 지정된 구산동고분군 중 하나였으나, 지난 1987년부터 시작된 동상대성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의 회오리에 휘말려 존폐 또는 이전 여부를 둘러싸고 갖은 시련을 겪다 간신히 살아남은 유적이다. 토지구획정리사업도 난항을 거듭해 23년 만인 지난 8월에 드디어 준공될 것이라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새롭지만, 국가 사적에서 해제된 유적을 지난 1999년 경상남도 문화재위원회가 다시 도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할 때 주변의 여러 압력들과 싸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업주 몇몇 분은 보다 많은 이익을 포기해야 했지만, 덕분에 김해시민 전체는 참 좋은 전망의 쌈지공원을 가지게 되었다.
 

▲ 구산동백운대고분꽃단장
구산동에 백운대의 이름이 더해진 까닭은 이 고분이 위치한 백운대라는 지명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운대란 지명은 서울 북한산에서 유명하듯 금강산과 오대산에도 있고, 문경이나 경주에도 있어, 그 일대에서 전망이 탁월하거나 마을 전체가 잘 내려 다 보이는 곳에 곧잘 부쳐지던 이름이었다. 이러한 지역의 고적과 이름 모두 버릴 수는 없었다. 또 이전을 반대하고 현 위치의 보존을 끝까지 주장했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 고분이 김해가 가야에서 신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시간표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지난 1997년 부경대박물관의 발굴조사로 6세기 후반의 신라고분임이 밝혀져, 가야의 왕이 신라의 지방장관으로 전락하는 역사적 전환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적을 다 남길 수는 없지만 고대의 김해가 가야에서 신라로 바뀐 것을 보여주는 구산동백운대고분을 기록만으로 남기거나 이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김해 찾는 분들을 안내하고, 전망과 산책을 즐길 때면 남기길 참 잘했다란 생각에 변함이 없다.
 
▲ 구산동 고분군
동쪽 돌계단으로 가야로(활천산복도로)에 내려서서 구산터널 쪽으로 몇 걸음을 옮기면 머리위로 구산동고분군이란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아래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의 내리막길이 있다. 키 작은 조릿대로 시작된 길은 이내 탱자나무 섞인 찻잎 길로 바뀌고, 큰 소나무를 왼쪽으로 끼고 돌면 아랫쪽에 갑자기 꽤 큰 마운드(불룩하게 솟은 것)를 가진 고분이 나타난다. 겨우 3기만 남게 된 구산동고분군 중 두 번째 고분이다. 훨씬 작은 규모의 세 번째 고분이 북쪽으로 보이고, 서쪽 나무 몇 그루 사이로 허왕후릉이 숨바꼭질하고 있다. 셋째 고분의 오른쪽을 지나면 길은 허왕후릉의 동쪽 담벼락에 막히게 되는데, 여기까지 오는 사이에는 집도 있고 텅빈 축사도 있지만, 인적 드문 숲속에 자리한 두 고분의 오버랩은 잠깐이나마 인디아나 존스의 기분조차 들게 한다.

담벼락에 막혀 곧장 허왕후릉으로 갈 수는 없다. 허왕후릉 담장을 따라 아스팔트길을 남쪽으로 내려가니 비좁은 길 한 편에서 택시기사 한 분이 한가로이 차를 닦고 있다. 요 어디에 사시는 모양이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재래식 주택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집고 나가면 오른 쪽에 허왕후릉 홍살문이 보이는 터진 공간이 된다. 사시는 분들이야 불편하겠지만, 기와지붕 시멘트벽 모서리에 옛날 담배가게 진열장이 박혀 있는 모양도 정겹고, 구불구불한 길과 낮은 집에서 느껴지는 사람 냄새는 추운 날 양지 바른 벽에 등대고 '기름짜기, 영차' 하던 어린 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구남문(龜南門)을 통해 허왕후릉에 오른다. 바로 난 신도(神道) 오른쪽에는 파사석탑이 지난 사연을 얘기하고, 왼쪽 식수대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입 맞추는 쌍어(雙魚)가 앙증맞다. 계단을 오르면 6단 정도로 쌓아 올린 사각형 담장 한 가운데에 왕후릉이 있고, 그 앞에 '가락국(駕洛國)수로왕비(首露王妃)보주태후(普州太后)허씨릉(許氏陵)'이라 쓴 비석이 서있다. 허왕후를 인도공주처럼 기록했던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도 있지만, 가락국 절반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허왕후 집단의 물건들, 곧 '메이드 인 인디아'가 지금까지 발굴된 2천여 기 이상의 가야고분에서 확인된 적은 전혀 없다. 반면에 다수 출토되고 있는 중국계통의 문물들은 그녀의 출발지를 짐작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그 시비를 가릴 만한 여유는 없다. 필자가 쓴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여행>의 일독을 권하고 싶지만, 우선은 서북한 지역에서 한(漢)계통의 선진문화를 가지고 김해에 들어왔던 세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허왕후가 가지고 들어 온 물건을 '한(漢)의 사치스러운 여러 물건'을 뜻하는 '한사잡물(漢肆雜物)'이라 쓰고 있는 것이다.

능 앞 계단을 내려와 오른쪽 구지봉으로 향하면 도로 위를 지나는 구름다리를 건너게 된다. 구지터널이란 이름의 이 다리는 일제가 부산~마산을 통하는 국도를 개설하면서 잘랐던 지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역의 어르신들은 거북이 목에 해당하는 이곳이 잘렸기 때문에 이후 김해서 인물이 나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그래서 구름다리를 만들고 흙을 덮어 지맥을 이었더니 인물이 나게 되었단다. 좀 전까지만 해도 주촌면 출신의 박찬종씨를 얘기하더니, 김해김씨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거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로 그 분이라는 현대의 전설이 이어지고 있다. 김대중 정권 출범 당시 대통령 김대중, 국무총리 김종필, 비서실장 김중권 3씨 모두가 김해김씨인 것을 두고 1천500년 만에 가락왕권이 부활했다고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 김수로왕릉으로 옮겨진 구지봉6란석조기념물
드디어 구지봉에 오른다. 원래 경상남도기념물이었던 것이 지난 2001년 3월에 국가 사적 제429호로 승격되면서 오히려 구지봉의 풍경은 삭막해 졌다. 지난 1908년에 세워진 수로왕 탄강의 기념비도, 지난 1976년 7월 김해 출신으로 8년간 대한체육회장을 지내고 서울올림픽 유치에 공헌하는 등 대한민국 체육발전에 초석을 다졌던 김택수 형제 분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용과 9마리의 거북으로 둘려진 6란(卵)의 석조물도 같이 세워졌던 탄강비와 함께 치워졌다. 국가 사적이 되어 원 지형을 회복한다고 취했던 조치였을 것이나, 그런다고 가야시대의 지형이 회복될 리 없고, 휑하니 빈 공터로 남아 수로왕 탄강 이후 대대로 김해 사람들이 믿고 이야기해 오던 사연이나 흔적들을 전혀 전할 수 없게 되었음만 안타깝다.
 
이후 김해시는 뭉툭하게 생긴 바위를 세우고, 한 그루의 신단수(神檀樹)와 함께 필자에게 부탁해 서사시 풍 안내문의 검은 판석도 앉혔으나, 어떤 종교인의 소행인지 수차례 신단수가 잘려나간 끝에 기둥바위 만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나저나 실제로 수로왕의 탄강을 지켜 본 증인은 따로 있다. 남쪽 끝에 자리한 구지봉석고인돌이 그것이다. 그 사연은 따로 얘기하기로 하지만 우선은 새로 만든 전망데크로 나가 해반천과 대성동고분군, 봉황대와 임호산, 그리고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수로왕 기분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구지봉석 고인돌
수로왕 이전부터 풍요 빌던 '굿봉'서 유래

두껑돌에 한석봉 글씨라 전하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 깊게 새겨져 있어 구지봉석고인돌이라 불린다.

▲ 구지봉석 고인돌
이런 고인돌은 늦어도 기원전 1세기 이후에는 만들어지지 않는 청동기시대인들의 무덤인데, 수로왕은 기원후 42년에 구지봉에 등장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이 고인돌은 적어도 수로왕 등장 150년 전부터 지금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로왕의 탄강을 지켜본 산 증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로왕 등장 이전의 무덤이기 때문에 수로왕의 등장을 기원했던 구간시대의 지도자가 묻혔을 것이고, 시내에서 올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했기 때문에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굿판 벌이며 풍요를 빌던 곳이기도 하였다. 굿을 벌이는 '굿봉'에서 '구지봉'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일본에 건국신이 내렸다는 '쿠시봉'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영식(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 인제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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