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이외의 것은 모르고 살아온 인생
도자기 욕심은 집착이라 불러도 좋다
다만, 흙의 정직함으로 살고 싶었을 뿐

도예촌 진례와 김해분청도자축제 초석
2008년 쓰러져…지난달 31일 지병 별세

"흙의 정직함처럼 남은 생을 살고 싶다."

김해의 도예가 1세대인 고 종산 배종태(사진) 선생이 생전에 했던 말씀이다. 흙 이외의 것은 모르고, 오로지 도자기에만 한평생을 바친 종산 선생이 지난달 31일 오후 7시 30분 진영 한서재활요양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유해는 경남 마산 법지사 납골당에 모셔졌다. 향년 85세.

종산 선생은 1929년 김해에서 태어나 평생 도예가의 길을 걸었다. 그가 생전에 전시회 안내책자에 남긴 인사말을 보면 "해방이 되던 해인 열일곱 살 무렵 처음으로 흙을 만져 생계의 수단으로 옹기 굽는 일을 시작했다. 옹기를 시작으로 운명처럼 도자기의 멋에 이끌려 긴 세월을 흙에 바쳐 살아왔다"고 적혀 있다. 종산 선생이 2008년에 쓰러져 최근 운명할 때까지 활동을 못한 6년 세월을 빼더라도 60년이 넘는 시간을 흙에 바쳐 살았던 셈이다.

종산 선생은 1946년 울주토기에서 도예에 입문했고, 1975년 김해 최초의 한·일 공동 도예작업장을 설립했다. 1978년에는 송정요업을, 1982년에는 토광도예를 설립했다. 1989년 전승도예협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그는 도예촌이라 불리는 오늘날 진례의 모습을 가다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해분청도자기축제의 시작인 1996년 제1회 축제도 그가 계획하고 추진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김해시문화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제42회 경남도문화상 조형예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 고 종산 배종태(왼쪽) 선생이 생전에 아들 배창진 씨와 함께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가마를 살펴보고 있다. 아래 사진은 종산 선생의 작품 정호다완. 사진제공=배창진 씨

선생은 안내책자 인사말에서 "웅기를 굽던 느낌으로 빚은 도자기. 스승 없이 시작하였기에 역경도 있었다. 그렇지만 틀에 박히지 않은 독창적인 그릇을 도자기 본래의 실용성에 접목시켰다"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그는 "과학적인 이론보다는 끝없는 탐구와 열정, 그를 통한 흙과의 교감에서 자유로운 예술혼이 살아난다"며 "푸른 골짜기에 묻혀 흙가마를 짓고 장작을 지피고 전통도자기를 구워내는 것이 천직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흙 이외의 것은 모르고 살아온 인생. 그런 만큼 도자기에 대한 욕심은 집착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흙의 정직함처럼 남은 생을 살고 싶다"며 도자기를 향한 평생의 열정을 드러냈다.

'김해 도예의 산증인'인 종산 선생의 별세 소식을 접한 도예가 등 예술인들은 물론이고 김해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30년 넘게 종산 선생을 알고 지냈다는 서예가 범지 박정식 씨는 "분야는 다르지만 예술가의 대선배였다. 그의 작품에는 기교가 없다. 그래도 흙의 생명력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화려함은 순간적으로 좋지만 계속 보면 질린다. 그래서 기교가 없고 번쩍거리지 않고 무게감 있는 선생의 작품이 더 좋았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나도 저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해 예술의 뿌리인 큰 어른을 잃었다. 생전에 한 번 더 찾아뵈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착잡하다"고 말했다.


문인화가인 목천 김상옥 씨는 "선생의 사발이 좋아서 자주 찾아갔다. 화려하지 않고 친근한 느낌, 손에 쥐면 안겨오는 느낌이 좋았다. 아들인 배창진 씨가 가마를 열어 그릇을 꺼내는 날이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마 앞에 앉아 아들의 그릇을 묵묵히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며 생전의 모습을 들려주었다. 그는 "선생이 좀 더 살아 있었더라면 김해의 도예는 더 발전했을 것이다. 선생의 활동과 업적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명을 달리해 안타깝다. 이제라도 선생의 모습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종산 선생이 쓰러지기 직전에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김해전통서화연구회 김현대 회장은 "김해사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선생을 만났다. '이 분은 도인인데 세상이 몰라주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며 "선생과 같이 김해의 흙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선생의 작품을 알아보고 좋아했던 사람들이 소장작품을 모아 추모전시회라도 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해도예협회 박용수 이사장은 "선생은 김해의 도예가 1세대이고, 김해의 어른이며, 예술계의 대선배였다. 김해의 도예를 활성화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한 인물이다. 도예계의 어른이 떠났다는 마음에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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