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민주 김해문인협회 회장
나의 선조 양사언 할아버지는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로서 오르고 또 오르면 사람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고장 김해에는 사람이 아무리 오르려 해도 오르지 못할 뫼가 두 개 있다.
 
사춘기 시절 나는 뒷동산을 자주 올랐다. 시골집 뒤란을 지나 산마루에 오르면 금줄을 두른 커다란 당산 소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소나무 밑에 앉으면 저 멀리 하얀 백사장의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변에는 황금물결의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고 하늘은 파랬다.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를 고민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 글도 썼다. 처녀였던 국어선생님이 종종 글짓기 숙제를 내주셨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런 글을 쓴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나를 모른다"로 시작해서 선생님의 머리 모양, 웃는 모습, 가슴 크기, 내숭 떠는 겉모습 등을 글로 묘사만 하여 제출했다. 나를 모르겠지 하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쓴 것 같다. 다음날 선생님은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어제의 글짓기 숙제로 말미암아 혼이 날 것을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그 일로 나에게 벌을 내리셨다. 그런데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선생님은 "나는 너를 알고 있는데 너는 왜 모른다고 하느냐!"면서 혼을 내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벌을 주셨는데, 그 벌이 매주 한 편의 글을 지어서 검사를 받는 것이었다. 한동안 교무실 선생님 책상 옆에 뻘쭘히 서서 글짓기 검사를 받던 모습이 그려진다.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나에게 글을 쓰게 하기 위한 선생님의 깊은 배려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 한글은 보이는 것의 묘사만으로도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추석 연휴도 지나고 얼마 있지 않으면 한글날이다. 한글날이 오면 세종대왕과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켜내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생각난다. 그중에서도 김해가 낳은 큰 산인 한뫼 이윤재(1888~1943) 선생과 눈 덮인 하얀 산 눈뫼 허웅(1918~2004) 선생이 떠오른다.
 
<김해뉴스> '김해 인물열전'에 의하면 한뫼 이윤재 선생은 김해시 대성동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조국에 바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살았다. 민족의 얼을 지키는 교육자이며 민족사학자로 일제에 의해 참혹한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뫼 선생의 묘는 대구시 달성군 마천산 자락에 있었는데 지난해 9월 한글학회에서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 가고 비석만 쓸쓸하게 남아 있는 것을 나는 지난 광복절에 직접 확인했다.
 
눈뫼 허웅 선생은 김해시 동상동에서 태어났다. 평생을 한글사랑과 나라사랑에 바쳤다. 일제의 핍박이 날로 심해지던 시절에도 선생은 오직 한글을 생각하는 삶을 선택했다. "나라말은 정신이며 겨레문화의 원동력이다"라고 하시면서 오롯이 우리말과 우리글을 위해 살다 가신 분이다. 수년 전 김해시에서는 허웅 선생 기념관을 짓기 위해 동광초등학교 근처에 땅을 마련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나다니는 길에 그 땅을 쳐다보면 차량이 어지럽게 주차되어 있다.
 
대구 마천산 자락에 쓸쓸히 남겨진 한뫼 선생의 비석을 헤아리고, 차량이 주차된 눈뫼 선생의 기념관 터를 바라보면 씁쓸한 기분이 든다. 관련 기관에서는 빨리 한뫼 선생의 비석을 김해로 가져오고 눈뫼 선생의 기념사업도 추진하면 좋겠다. 서슬 퍼런 일제의 억압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의 독립과 한글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인들을 김해에서만 이렇게 홀대해서야 되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매년 김해문화원에서 한글날을 전후하여 '한뫼 백일장'을 열어 이윤재 선생을 기리는 일이고, 올해는 <김해뉴스>에서 '눈뫼 허웅 선생 추모 한글사랑 생활수기 공모전'을 연다고 한다. 이는 고무적인 일로 계속 이어지는 행사가 되길 청한다.
 
김해에 있는 오르지 못하는 산, 바라보면서 한글사랑과 민족의 얼을 배우는 산, 김해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산, 한뫼와 눈뫼라는 두 개의 산이 있어 어떻게 보면 우리 고장 김해는 축복받은 도시이다. 김해의 시민들이 두 분의 뜻을 기렸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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