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파트 입구에서 생선을 팔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엄마가 왜 저기서 생선을 팔고 있지?" 무용과를 다니던 대학생 딸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어머니는 딸에게 무용콩쿠르대회 참가에 필요한 경비를 내밀었다.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감사히 받은 딸은 한국무용가가 됐다. 이영실(40) 씨의 매화무용단을 찾아가보았다.

춤을 추고 싶었던 딸, 반대했던 어머니
몰래 무용과 진학 후 묵묵히 뒷바라지
연습공간 열쇠 건네던 날 "이젠 네 몫"

승무 15년 익힌 뒤 태평무 매력에 흠뻑
"춤은 누가 추느냐에 따라 향기 다 달라"


이영실의 매화무용단은 삼계동 1462-7 빌딩 4층에 있다. 연습실 입구 신발장 위에는 흰 버선이 여러 켤레 놓여 있었다. 연습실에 들어올 때마다 신기 편하라고 놓아둔 것이었다. 넓은 연습실 끝에는 외북, 장구 등이 놓여 있었다. 스트레칭을 위한 발레바도 한 쪽을 차지했다. 벽면 한 쪽은 모두 거울이었다.
이영실은 충청도 청양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렸을 때 가족이 모두 김해로 이사를 와서 그에겐 김해가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춤추는 걸 좋아했다. 유치원과 활천초등학교 시절 재롱잔치나 학예회를 할 때면 무대 중앙은 늘 그가 맡았다. "춤추는 것도 좋았고, 무대에 섰을 때 사람들이 바라봐주는 것도 좋았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무용가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해 반대하셨죠." 김해중앙여중 시절 무용교사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무용을 권했지만, 학교 무용반 활동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무용반 친구 중에는 부산의 학원까지 다니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무용단 친구 중에서 지금도 무용가의 길을 걷고 있는 이는 이영실 뿐이다.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춤추고 싶어 하는 딸의 관심을 돌리려고 그랬던지 어머니는 노라노디자인학원에 보내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러나 이영실의 마음은 늘 춤에 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는 밀양백중놀이 연수에도 참가했다. 그는 이 연수에서 '범부춤'을 처음 접했다. 세마치장단에 맞추어 놀이판을 뛰어다니며 팔을 좌우로 흔들면서 추는 활개춤을 추고, 고개놀림, 어깨춤을 추는 형식이다. "처음 보는 범부춤은 신기했어요. 춤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어요. 저런 춤도 있구나, 저렇게 출 수도 있구나…. 연수가 끝나고, 달밤에 영남루에서 발표회를 했어요. 무대가 아닌 마당에서 춤을 추는 것도 처음이었어요. 질서가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질서가 있는 우리 춤, '허튼춤'이라는 우리 춤을 만난 겁니다. 정말 중요한 경험을 한 거지요."

그는 인제대학교의 풍물패 '맥'을 찾아갔다. '맥'은 당시 김해의 고등학생들과 인제대학생들의 연합풍물패였다. '맥'에 가입한 그는 주말마다 사물놀이를 배웠다. 지하에 있는 동아리방인 '맥방'은 그의 연습실이 되기도 했다. 모임이 있는 날이면 그는 늘 몇 시간 일찍 도착해 혼자 춤을 추었다. 공연에서 보았던 춤을 따라 하기도 하고, 혼자 춤동작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남들이 보면 혼자 그러고 있는 나를 미쳤다고 했을 거예요. 한참 연습에 몰두해 있을 때,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문을 열었다가 나를 보고는 살짝 문을 닫아주고 나가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인제대 축제 때 '맥' 공연에서 춤은 제게 맡겨주고, 무대에 세워주기도 했죠."

도저히 춤을 추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고3때 어머니가 디자인 학원비로 준 돈으로 몰래 무용학원에 등록을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부산여대 무용과에 입학했다. 딸에게 깜빡 속았던 어머니는 '등록금 못 해준다'고 버텼지만, 이영실은 2년 동안 장학금을 받는 우수학생으로 입학했다.

학창시절 무용콩쿠르대회 준비를 할 때였다. "집안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어요. 작품도 받아야 하고, 의상도 준비해야 하는데 그만한 돈이 없었어요. 교수님께 못 나간다고 말씀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어머니가 생선을 팔고 계시더군요. 알고 보니 제 콩쿠르 비용 마련을 위해 장사를 하셨던 거예요. 너무 안타까워했던 교수님께서 조교를 통해 그 실정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던 거지요. 전 어머니 덕분에 콩쿠르에 나가 2등을 했어요. 그 일 이후 부모님은 묵묵히 제 뒷바라지를 해주셨어요. 공연은 한 번도 안 빼고 보러오셨고, 아버지는 새벽까지 연습하는 나를 연습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집으로 태워오곤 하셨죠. 연습실에 간식도 넣어주시고…." 지난 일을 추억하는 이영실의 눈에 살짝 이슬이 비쳤다.

▲ "우리 춤은 묶여 있지 않은 춤입니다. 누가 추느냐에 따라 그 향기가 다르지요. 제게 춤은 삶 그 자체입니다." 한국무용가 이영실이 매화무용단 연습실에서 태평무를 추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김미숙 교수님. 제 평생의 스승이며, 멘토이지요. 열심히 하는 제자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무용학원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대학에 간 터라 다른 친구들에 비해 배울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습실에서 새벽까지 춤을 출 때가 많았는데 항상 저를 바라봐주셨죠. 경성대학교 무용과로 편입을 권한 것도 교수님이셨고, 어머니께 '춤꾼에게는 연습실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해주셨죠."

그가 대학 3학년이었을 때 어머니는 "함께 어디 좀 가자"며 이영실을 앞세우고 나섰다. 대성동 김해여고 아래 작은 건물 2층에서 열쇠로 문을 열자 40평 남짓한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어머니는 딸에게 열쇠를 건네 준 다음 "지금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라"는 말을 남기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이영실은 그제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연습실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는 홀로 남아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다고 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친구 한 명을 불러 그 길로 페인트를 사다가 밤새도록 페인트칠을 했다.

얼마 후 김해문화원에서 장구춤 공연을 하고 나자 김해YMCA, YWCA 등에서 한국무용수업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고정수입이 생긴 거지요. 그렇게 번 돈으로 거울 사서 걸고, 장판 깔고 하나씩 무용학원 모습이 갖춰졌어요. 아무 생각 없이 1년을 간판도 없이 있었는데, 누가 '왜 간판을 안 다느냐'고 해서 뒤늦게 '터울림 무용학원'이라는 간판도 달았어요. 간판을 달자마자 중·고등학생들이 막 들어오더라구요."

그는 얼마 후 대성동에서 외동으로 학원을 옮겼다. "김미숙 교수님처럼, 아이들과 함께 오로지 춤을 추기 위해서는 밥도 해먹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어요. 하루 종일 춤을 추며 살다시피 할 수 있는 곳, 그런 곳." 한때 그의 학원에는 200명의 학생과 4~5명의 조교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학원을 접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잖아요. 9세, 6세 두 아들과 3세 딸이 있어요."

세 명의 자녀를 기르면서도 그에게 춤은 여전히 소중하다. 이제는 학원에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매화무용단'을 만들어 연습하고, 공연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연습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들이 고맙고 기특하다"고 말했다.

그에게 기억에 남는 공연을 물어봤더니 이름난 공연장에서 한 공연이 아니라, 김해시민과 함께 한 공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해문화원에 가서 시민들이 함께 하는 강강수월래 공연을 해야 한다고 제의했는데, 문화원에서 흔쾌히 제 손을 잡아주었지요. 당시 공설운동장에서, 무용단원들과 김해민속보존예술회 회원들이 중간 중간에 서서 시민들과 함께 강강수월래 공연을 했지요. 재미있었고 가슴 벅찬 공연이었습니다. 김해여성복지회관에서 허황옥축제를 하기 전에 우리 무용단에서 가락문화제 중 야외공연으로 허황옥 공연도 먼저 했지요. 20대 후반에 제자들과 함께 김해의 각종 행사에 많이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대학에서 처음 승무를 접한 뒤 오랫동안 승무를 추었고, 태평무도 함께 추고 있다. "장삼자락이 멈춘 듯 하다가 다시 날리는 부분에서 오묘한 맛과 깊은 매력을 느껴 한영숙류 승무를 15년 정도 추었어요. 그러다가 다른 류의 춤이 궁금해 강선영류 태평무도 배웠습니다. 우리 춤은 묶여 있지 않은 춤입니다. 누가 추느냐에 따라 그 향기가 다 다르지요. 나에게 춤은 삶 그 자체입니다. 사계절의 느낌은 다르지만, 세월이 늘 우리를 감싸고 흐르는 것처럼, 춤은 늘 저와 함께 합니다. 춤을 추는 내 뒤에는 묵묵히 지켜봐주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언젠가 제 공연을 보고 난 뒤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하셨죠. '네가 좋으면 됐다'고요." 

≫ 이영실
한국무용가. 매화무용단 단장. 김해무용협회 감사.
연예술단 단원.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
전국 국악경연대회 전통부문(승무) 은상 등 수상 다수.
김해YMCA 청소년경연대회 심사 역임.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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