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 역사를 새로 쓰도록 만들지도 모르는 대성동고분군 93호분 전경.
대성동고분군 대형 목곽묘 93호분 발굴
금관가야 최고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
금동제 말방울 등 지배세력 연속성 증명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가야 역사를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르는 유적이 발굴됐다. 가야가 5세기 초 이전에 멸망했다는 기존의 학설과는 달리 5세기 중엽 이후까지도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대형 목곽묘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김해시 대성동고분박물관은 지난달 25일 박물관 세미나실 및 발굴조사 현장에서 '대성동고분군 9차 발굴조사 자문회의'를 열었다.

9차 발굴조사는 2013년 8차 발굴조사에서 확인한 지석묘에 대한 조사를 위해 지난 6월 24일부터 실시됐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측은 이날 자문회의에서 "대형 목곽묘 93호분이 확인됐다. 93호분의 구조는 대성동고분군에서 처음 확인된다. 형식을 볼 때 대성동 1호분의 계보를 잇는 금관가야 최고 지배층의 무덤이며, 대성동 1호분 다음 단계인 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이후 5세기 초 무렵부터 대성동고분군에는 대형무덤이 축조되지 않았기에 가야는 5세기 초 이전에 멸망했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대성동고분박물관 관계자는 "부곽을 다른 구덩이에 마련한 게 아니라, 같은 무덤 안에 마련했다는 점은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졌음을 말해준다"면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가야의 멸망 시기를 기존 학설보다 130년 뒤인 532년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추가 연구를 통해 기존 학설을 고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자문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은 "사라진 130여 년의 역사를 모두 증명하려 해도 지배세력의 무덤이 93호분 하나뿐이다. 발굴조사를 계속해 같은 시기의 지배세력 무덤을 더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 대성동고분군 93호분에서 나온 부장갱, 각종 유물, 5세기 중엽의 가야 토기, 금동제 말방울.(사진 위에서부터 아래로).
대성동고분박물관이 발굴한 93호분은 남북 방향으로 만들어졌으며, 다짐식 충전토에 부분적으로 돌들을 집어넣었다. 도굴 때문에 봉분의 흔적과 목곽 구조는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 93호분의 묘광(墓壙·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하는 무덤 구덩이)은 길이 660㎝, 너비 380㎝이다. 목곽은 길이 505㎝, 너비 255㎝다. 여기에서는 벽옥제관옥 2점, 금동마령 1점, 꺾쇠가 출토됐다.

93호분에서는 순장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치아편도 확인됐다. 이는 가야의 장례풍속을 그대로 유지한 금관가야 지배세력의 힘을 말해준다. 또 당시 가야연맹의 다른 지역에서는 수혈식 석곽묘로 바뀌던 시기였으나, 금관가야는 목곽묘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음도 증명하고 있다. 93호분 자체가 역사의 증거인 것이다.

93호분에서는 4세기 91호분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금동제 말방울이 출토됐다. 이는 4세기 지배세력에서 5세기 후대세력으로 금동제말방울이 전세(傳世·대대로 전한다)됐음을 말해준다. 이 또한 지배세력의 연속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김해시는 대성동고분 발굴조사를 9차로 일단락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문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추가 발굴조사를 실시하는 문제를 검토 중이다.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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