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고 싶다. 또한 살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부산 온천장 길을 걷던 '청년 탁원대'의 눈에 도자기 전시판매장이 들어왔다. 진열장에 비치된 도자기에는 분명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다!" 청년 탁원대는 무작정 도자기 전시판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도자기와 만난 그는 지금 전통을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올해 대한민국분청도자대전의 대상을 수상한 탁원대(49) 씨의 '우림도예'를 방문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청년 탁원대'
캔버스에서 도자기와 항아리로 옮겨
전통과 현대적 감각의 조화에 혼신

"도자기에 그림 그리면 천년이 가도 …"
독창성 바탕 공감의 작품 세계 추구
"옛것 연구와 새로운 것 시도 쉼없이"


▲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작품,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 보는 사람과 함께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우림도예 전시장 안에서 탁원대 씨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탁원대의 우림도예는 진례면 서부로 476번길 24에 있다. 이곳은 전시장과 작업장을 갖추고 있다. 전시장 안에는 사면을 돌아가며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분청사기를 전통 그대로 재현한 작품, 산수화를 비롯해 현대적 감각의 그림을 새겨 넣은 항아리, 나무 한 그루를 단아하게 올린 찻잔 등이 마치 전시회장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탁원대는 경북 영양군 입암면 대천리의 고추농사 짓는 집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났습니다. 양장점에서 옷 만드는 걸 보고는 집으로 돌아와 곧바로 식구들에게 바지를 만들어 입힐 정도였어요. 어쩌면 어머니의 손재주가 제게 이어졌는지도 모르지요."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염소가 말뚝에 매여 있는 걸 그렸더니, 집에 마실 왔던 마을 어른들이 보고는 "그놈 참 재주가 있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책과 공책의 여백을 비롯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종이는 모조리 어린 탁원대의 캔버스였다.

학창시절 내내 미술부 활동을 한 그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다. "중학교 때였어요. 장난기가 많았지요. 장난으로 볼펜과 연필로 천 원짜리를 똑같이 그려봤어요. 다 그리고 나니 '남들이 보기에도 똑같이 그려졌을까, 이게 통할까'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친구에게 주면서 빵을 사달라고 부탁했죠. 뒤에서 살짝 지켜봤더니, 친구가 빵과 거스름돈을 받아오지 뭡니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바로 매점주인에게 달려가 사실을 밝히고 사과드렸어요. 하마터면 위조지폐범이 될 뻔했어요. 고향에서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지요." 그가 어릴 적 장난을 털어놓으며 웃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교 축제에서 미술반 전시회가 열렸다. 그때 그는 코스모스를 그린 작품을 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액자로 만들어 내라'며 선선히 3만 원이라는 큰 돈을 주셨어요. 그래서 그림을 액자에 넣어 전시할 수 있었지요. 전시회를 보러 오신 선생님 한 분이 '네 그림을 꼭 가지고 싶다. 10만 원에 팔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옆에 있던 다른 선생님이 '아직 어린 학생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하셔서 거래(?)가 무산됐지요."

고등학고 1학년 때는 산수화에 빠졌다. 달력에서 본 조선시대 화가 이인문(李寅文·1745~?)의 '강산무진도'를 보고 큰 감흥을 느낀 그는 그림을 똑같이 그렸다. 중학교 3학년 때 그린 코스모스 그림을 떼어낸 캔버스 위에 그가 그린 '강산무진도'를 붙여 학교 전시회에 다시 냈다. 이때에도 많은 화제가 됐다.

이발소에서 본 호랑이 그림에 반해 한동안 호랑이를 하루에 두어 장씩 그리기도 했다. 그는 합판 위에 켄트지를 붙이고 대나무 밭에 나타난 호랑이 그림을 그린 다음 니스칠로 마감을 한 작품을 완성했다. 이 그림을 교실 뒤 게시판에 걸어 두었다. 교장선생님이 지나가다 보고는 "학생 작품을 걸어야지, 화가 작품을 사 와서 걸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만큼 학교 안에서도 유명했던 이 호랑이 그림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은 이후 수십 년간 미스터리였다. 그런데 얼마 전 고교 동창이 "사실은 내가 훔쳐갔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자백해옴으로써 진상이 풀리기도 했다. 그 친구는 "도자기에 호랑이를 그린 작품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탁원대의 그림 솜씨는 이렇듯 유명세를 많이 치렀다. 학교에서 전시회를 열 때면 인근 학교의 학생들도 찾아왔다. 그의 그림 옆에는 여학생들이 붙인 쪽지들이 즐비했다. 늘 선배들이 그 쪽지를 미리 수거해가는 바람에 한 번도 그 내용을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학교 교사들을 비롯해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은 포스터컬러 물감을 그림 값 대신 냈다.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그려 팔아 물감을 마련하기도 했다. 친구들이 가수나 영화배우에 빠져 있을 때, 그는 그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TV의 캠페인 광고에서 청자장 인간문화재 해강 유근형을 보면서 "나도 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해서도 그림을 그리는 일은 계속 됐다. 부대 안의 구내식당 내부를 산수화로 그리는 큰일을 맡기도 했다. 제대를 앞둔 부대원들의 추억록을 그리는 일은 일상이었다.

제대 후 그는 '어떻게 하면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산의 온천장에서 도자기 전시판매장을 발견했고, 도자기에 그림이나 문양을 그리고 조각하는 문양사(조각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김해의 금강도예에서 문양사 일을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자연스레 문양사가 됐고, 도자기 문양과 그림에 심취하게 된 거지요. 제가 그림을 그리는 화면이 네모난 캔버스에서 도자기와 항아리로 바뀐 겁니다."

전통적인 문양을 배우고,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내는 문양사 일은 타고난 천직처럼 잘 맞았다. "너무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지요. 새벽 2~3시까지 일해도 피곤한 줄 몰랐고, 계속 그리고 조각하고…." 그는 금강도예 외에도 진례의 각 요에서 요청하면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9년에 송정리 하둔덕마을에 우림도예를 설립했다.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은 2007년이다.

▲ 탁원대 씨가 만들고 있는 작품. 꿈을 품고 살아가는 듯 도자기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전통 도자기를 연구하고 만들면서 문양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도자기를 찾는 사람들의 기호도 변했습니다. 항아리에서, 다기세트로, 또 생활식기로 흐름이 바뀌었지요. 저도 전통을 바탕으로 한 도자기에 현대적 감각, 저만의 색깔을 표현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제가 전통적인 도자기에서 감흥을 느낀 이유가 그 안에 그 시대의 정신과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제 작품 역시 보는 사람들에게 그런 감동과 감흥을 주고 싶었습니다. 저도 느끼고, 보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작품,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탁원대만의 작품,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통상 분청도자기를 만들 때는 거친 흙으로 기물을 성형하고 그 위에 고운 흙의 화장토를 발라 문양을 올리는데, 그는 역발상으로 접근했다. 고운 흙으로 만든 기물에 거친 흙으로 그림이나 문양을 올렸다. 이때 떨어지지 않고 잘 붙도록 하는 배합이 중요하다. 탁원대가 개발한 방법은 특허청의 인정을 받아 10-1083757호로 특허청에 등록돼 있다.

"옛 분청사기의 그림이나 문양을 보면 거침없이 그려져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순수한 영혼으로 가식 없이 표현한 그림. 자신이 없으면 그런 그림을 그릴 수가 없지요. 처음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 이후 지난 25년 동안 계속 그리고 조각해 온 덕분에 저도 조금은 자신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옛것을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탁원대가 올해 대한민국분청도자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 '분청속으로'도 그런 새로운 시도에서 나온 작품이다.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도예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겠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봐도 멋지다고 인정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인터뷰가 끝날 즈음 처음 도자기를 접했을 때 했던 생각을 들려주었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까 골몰해하던 제 눈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가 들어왔을 때,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천 년도 살 수 있겠구나, 오래 남겠구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 탁원대
우림도예 대표. 김해도예협회 이사. 김해분청도자기축제 추진위원. 경남차사발전국공모전 및 초대전 운영위원. 제5회 대한민국분청도자대전 대상, 제7·8회 김해시 관광기념품전국공모전 대상, 제5회 김해공예대전 대상, 제39회 경상남도 공예품대전 금상, 제39회 대한민국 공예품대전 장려상 등 각종 공모전 수상 다수. 2014 경남차사발초대전 초대작가, 2013 경남메세나 선정 작가, 한국미술대상전 초대작가.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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