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영감할미과장에 나오는 '작은 이'의 탈이죠." 김해민속예술보존회 천승호 회장이 김해오광대 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나래 skfoqkr@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끼와 인생역정
어딩이·할미 맛깔스러운 역할의 밑천
몸짓 하나 대사 한대목마다 "내 인생"

김해오광대 문화재 인정받는 데 진력
내달 2일 연음예술단 15주년 기념공연


"저 할매가 누고?" "진짜 할매가 와서 울고 가겠네!" 

지난달 16일 장유문화센터에서 열린 김해오광대 공연의 '할미영감과장'에서 최고스타는 단연 할미였다. 할미의 몸짓 하나 대사 하나는 관람객들을 울리고 웃겼다. 할미의 탈 속에는 김해민속예술보존회 천승호 회장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놀이판의 춤을 한번 보기만 하면 그대로 흉내냈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끼를 타고 난 것이다. 다양한 직업을 가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젊은 시절은 그에게 사람이 사는 세상의 희로애락을 가르쳐주는 현장이었다. 김해오광대의 '어딩이'와 '할미'를 연기하는 그는 "나는 한 사람의 광대"라고 말한다.

'김해의 광대' 천 회장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의 이야기는 대목마다 재미있고 구구절절 신명났다. 인터뷰를 한다기보다 넋을 놓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한참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이 재미난 이야기를 어떻게 기사로 쓰나, 슬슬 걱정이 될 정도였다.

김해문화원 건물 오른쪽 뒤편에 김해민속예술보존회 사무실이 있다. 김해보건소와의 경계에 나무가 심어져 있어 숲속의 작은 집처럼 보인다. 사무실 벽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김해오광대의 탈을 촬영한 사진들이 걸려 있다. 보존회가 각종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받은 상장도 즐비하다. 북, 장구 아래에 오광대 공연 때 사용하는 탈이 들어 있는 상자도 보인다. '내 고장 전통문화 우리 함께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표어도 붙여져 있다.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바람을 담은 이 표어는 천 회장이 직접 지었다.

천 회장은 경남 통영군 산양면 추도리에서 미역 양식장을 했던 부잣집 8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그의 가족은 부산 영도로 이사를 갔다. 부친은 봉래동에서 큰 쌀 도매상을 운영했다. 봉래동은 전라도, 경상도 곡창지대의 쌀을 배에 싣고 와서 부리기 쉬운 곳이었다. 영도다리만 건너면 부산역이 가까워 쌀 도매상을 하기에 적합했다.

"아버지는 한량기질이 많았습니다. 친구들이나 지역유지들과 어울려 악극단도 불러 놀이판을 벌이곤 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름난 소리꾼, 기생들을 많이 보았죠. 그들의 춤, 소리, 연기를 한 번 보면 그대로 따라 하곤 했어요. 어른들 앞에서 춤을 추면서 용돈도 많이 받았어요. 집에 장롱만한, 어린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어요, 큰 진공관전축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임방울 등 여러 명창들의 음반을 틀어놓고 소리를 들을 때 저도 옆에서 함께 들었지요."

여섯 살 즈음 그에게 소아마비 증세가 왔다. "일본에서 의사를 불러와 큰 수술을 했습니다. 제 어깨를 만져보면 5㎝ 정도 뼈가 없어요. 제가 김해오광대에서 절름발이인 어딩이 역을 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인연이 아닐까 싶어요."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이 '광대 천승호'로 이어져 있음을 들려주는 첫 번째 이야기였다.

천 회장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가족은 온천장 인근으로 이사를 갔다. "현재 부산원예고등학교 뒤편에는 봄이 되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지요. 봄마다 벚꽃그늘 아래서 놀이판이 벌어졌습니다. 동래지역의 한량, 소리꾼, 광대들이 모여 한바탕 논 거지요. 친구들과 어울려 그 놀이판을 보러 다녔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다 공부였던가 봅니다."

그 때 어머니가 동래시장에 한복점을 열었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도 보고, 한복점에 와서 모질게 구는 손님들도 보았지요. 어머니가 무병을 앓아 굿도 여러 번 했지요. 걱정도 많았지만 무속예술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셈이지요."

목수일을 시작한 아버지는 큰 공사를 맡기도 했지만 공사비를 떼이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나왔고, 이런저런 풍파를 많이 겪었다. 걱정 많은 집안일들을 어린 가슴으로 삭혀내는 동안에도 그의 내면은 재주와 끼로 뜨거웠다.

▲ 김해오광대 공연에 사용되는 각종 탈들.

"놀이판과 악극단을 늘 기웃거렸어요. 악극단 천막 밑으로 기어들어가 공연을 보다가 잡혀서 밤새 청소도 해줬고, 차력사 공연 중에 관객들 중에 누가 올라와보겠냐는 말에 겁도 없이 응했다가 죽을 뻔 한 적도 있어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소풍, 여행, 오락시간마다 앞에 나섰다. 나가서 재주를 과시한 게 아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고 놀지 판을 짜는 섭외부장이었다. 말하자면 공연 내용을 짜는 기획이었던 셈이다. "본래 성격은 내성적이었어요. 자꾸 사람들 앞에 나서다보니까 점점 외형적으로 되어가더군요. 집에서는 말썽꾸러기였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인기 최고였어요."

천 회장은 친구들과 함께 무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여행을 다니다가 차비가 떨어지면 사람들 앞에 나서서 너스레를 떨며 차비를 구하는 건 제 몫이었어요. 사람들 마음을 움직여야 했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연기 공부가 됐던 것 같아요."

학교를 졸업한 후 그가 거쳤던 직업은 다양했다. 장남이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많이 느꼈다. 자동차 라이트 전구에 관한 기술을 배웠고, 서울과 경기도의 회사에서 기숙사 생활도 했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의류공장 일을 도우며 재봉틀을 배우고, 고장 난 재봉틀을 수리하는 일도 배웠다. 부산 동보극장 영사실에서도 일했다, 3개월 여정의 고등어 운반선을 타고 제주를 거쳐 동인도차이나해를 오가기도 했다. 제대한 후에는 과일, 꽃, 다리미 장사도 경험했다. 타일위생기 회사에서 영업을 하며 부장으로 승진도 했다.

천 회장은 그 때 부산과 김해를 오가며 영업을 하다가 1989년 김해로 왔다. 내외동이 한참 개발될 때 타일위생기 대리점을 연 것이었다. 몇 년 후 대리점을 접고 직접 가게를 열어 사장이 됐지만, 자금 압박도 겪어보고 돈을 떼이기도 했다. 김해에서는 노래방, 전통찻집, 레스토랑, 인테리어 사업에도 손을 댔다. 이쯤 듣고 보니 그의 직업변천사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이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그 마음속에는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 그래서 인간의 희로애락이 무엇인지 하나씩 배워갔던 것이다. "제 능력과 행동, 제가 이룬 결과들이 모두 하나의 구심점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던 거지요. 짧다면 짧은 그 시간동안 쌓은 경험들이 컸습니다."

천 회장이 내동에 살 때 같은 건물에 체육관이 있었다. 10세 때부터 태권도를 했던 그는 체육관의 부관장을 맡았다. "체육관에서 검법술대회를 열었어요. 축하공연을 하면서 김해의 놀이판 사람들을 알게 됐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내동 상인들을 모아 사물놀이단인 '상우회'를 만들었죠. 김해, 부산 등 전국의 여러 단체와 스승들을 찾아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회원들에게 가르치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천 회장은 12발 상모놀이 명인 이금조의 제자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연습을 했지요. 풍물놀이에서 12발 상모놀이를 주특기로 삼았죠. 한 동작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해질 무렵 연습을 시작해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뛰었지요. 땀인줄 알고 닦았더니 그게 피였던 적도 있었어요. 상모가 머리를 눌러 스쳐 피가 난 줄도 모르고 연습한 거예요."

그는 1995년 김해풍물단을 창단했다. "제가 여러 사람 버려놨지요." 그는 이렇게 고백하며 웃었다. "생업을 하면서도 놀이판에서는 날개 단 듯이 펄펄 나는 그 회원들이 지금 김해민속예술보존회 사람들입니다."

김해오광대와 만난 것은 1994년 내외동에서 노래방을 할 때였다. 당시 김해민속보존회의 이명식 부회장과 정용근 총무가 노래방에 손님으로 왔다. "그 두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쳐놨지요." 그는 이 말을 하며 크게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신이 나 죽겠다는, 드디어 만날 사람들이 만났다는 표현을 이렇게 한 것이다.

"김해오광대에서 처음 맡은 역할이 절름발이인 어딩이였어요. 온천장 벚꽃놀이에서 본 춤이나 공옥진 선생의 춤이 다 도움이 됐어요. 김해오광대를 문화재로 인정받기 위해 복원하는 과정에서 할미 역할도 맡았습니다. 김해오광대의 할미는 '여성 파워'가 있어요. '오동통한 체격의 할미에 딱 맞다'는 소리를 들으며 할미가 됐지요."

파란만장(?)한 삶을 겪어온 천 회장은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이 광대로 살아가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추도의 외삼촌이 당산제 상쇠입니다. 그 내림이 제게도 이어지나 봅니다. 어머니가 앓았던 무병까지…. 토속신앙, 무속예술, 민속예술 그 모든 것이 저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놀이판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저의 거울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지금껏 제가 만난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장도요. 그 모든 한이, 사람의 희로애락이 표출되는 거지요."

천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힘주어 말했다. "무던히 안 해보려고도 애써봤지요, 그런데 무언가가 저를 잡고 있어요. 혼자 울기도 했습니다. 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수밖에 없어요. 그 길만이 저의 열정을 끝까지 가져가는 것입니다."

천 회장은 지금 김해민속예술보존회 회장으로서 김해오광대를 문화재로 인정받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내달 2일에는 그가 1999년에 창단한 연음예술단 창단 15주년 기념공연이 열린다.

마치 판소리 사설처럼 길었던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그는 말했다. "제가 제 팔자를 왜 이리 고되게 하는가 생각해봤지요.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어요. 인생은 고되고 힘들고 때로는 허허롭지요. 바로 그것을 메우는 것이 신명입니다. 이 세상에 잠깐 왔다 가는 인생이라면 한판 신나게 놀고 갈 만하지요. 저라는 사람이 한 명의 광대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천승호는 광대입니다."

≫천승호
김해민속예술보존회 회장. 연음예술단 대표. 경남국악협회 부회장.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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