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가담 여중생들 징역형 선고
재판부가 부모의 마음 헤아린 결정
가해자측에선 항소하겠다고 연락해와

인사성도 밝고 착해서 사랑 많이 받아
중학교 때 왕따 사실 접한 뒤 큰 충격
김해 전학 온 뒤 별 탈 없이 잘 컸는데
기억하기조차 싫은 일이 벌어지다니 …


"새벽 꿈에 딸 아이가 보였어요. 함께 다니던 교회였죠. 함께 있다 인파 속에서 헤어지는 꿈이었어요. 딸 아이는 살아 있을 때 학교를 마치면 늘 제가 일하던 공장에 찾아와 '아빠' 하고 큰 소리로 불렀어요. 지금도 퇴근시간만 되면 습관적으로 딸의 모습이 떠올라요. 매일 퇴근 후에는 딸 아이의 사진 앞에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넋두리만 늘어놓는답니다."

지난 11일 창원지방법원 제4형사부(판사 차영민·조형우·황여진)는 김해여고생 윤 모(15) 양 살인(<김해뉴스> 8월 20일자 2면 등 보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김해의 10대 여중생 3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된 양 모(15) 양에 대해서는 징역 장기 9년부터 단기 6년을, 허 모(15) 양과 정 모(15) 양에 대해서는 각각 징역 장기 8년부터 단기 6년을 선고했다.

칼바람이 불던 지난 14일 삼방동의 한 카페에서 고 윤 양의 아버지 윤 모(50) 씨를 만났다. 그는 먼저 휴대폰에 저장한 딸의 옛 사진을 보여주며 살아생전 딸의 모습에 대해 천천히 회상했다.

"딸 아이가 교회에서 얼마나 마당발이었는지 몰라요. 교회에서 저보다 아는 사람이 훨씬 많았답니다. 워낙 인사성도 밝고 착해서 나이 많은 어른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어요."

윤 씨에게 딸은 늘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그는 2000년 부인과 이혼한 뒤 딸을 혼자 키웠다. 직장 일과 육아를 함께 하기 힘들어 이제 막 걸어다니기 시작한 세 살배기 딸을 보육원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딸을 키우려면 직장에 다녀야 했지만 주변에는 돌봐줄 사람이 없었어요.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다 할 수 없이 보육원에 맡겨야 했어요. 그래도 2주에 한 번씩 주말이 되면 꼭 딸을 만나러 갔어요. 딸은 저를 볼 때마다 '아빠' 하며 힘차게 달려와 안겼죠."

윤 씨는 딸이 5세 되던 해 경기도에서 부산으로 이사하면서 보육원에서 딸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가 다섯 살이나 됐지만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아빠밖에 없었어요. 다시 저랑 헤어질까 두려워서인지, 딸은 저와 함께 산 이후 두 달 동안은 화장실까지 졸졸 따라다녔어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윤 씨는 딸을 잘 키우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여느 부모가 그렇듯 항상 딸을 먼저 생각하며 애지중지 키웠다. 그러다 딸이 중학교 1학년일 때 담임교사로부터 열흘째 등교하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다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이었다. "담임교사의 전화를 받고 참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사는 데 바빠 학교생활에 신경을 못 썼더니 왕따를 당하고 있었더군요. 전학을 원하는 딸의 의사를 존중해 2011년 김해로 이사를 왔습니다."

전학을 한 후 딸은 별 탈 없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다. 2월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김해의 한 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유치원 교사를 꿈꿨던 딸은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더니 3월 15일 홀연히 집에서 사라졌다. 그는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딸을 찾을 수 없었다. 경찰 조사만 바라보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5월 2일, 윤 씨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그에게 "직장 위치를 알려달라. 만나서 말하겠다"는 말만 했다. "경찰의 전화를 받고 난 뒤 가슴이 조여오기 시작했어요. 1분 1초가 정말 길게 느껴졌습니다. 경찰차에 탔더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소리를 하더군요. 함께 가서 시체를 보고 딸아이가 맞는지를 확인하라고…. 정말 자신이 없었어요."

겨우 용기를 낸 윤 씨는 딸의 주검을 본 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사실 딸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얼굴은 시커멓게 타서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머리카락에는 하얀 콘크리트 가루가 묻어 있었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유전자검사를 통해서 윤 씨는 그 주검이 딸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는 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불과 사흘 뒤 딸과의 슬픈 기억만 남아 있는 김해를 떠나 부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가해 여중생들의 재판이 진행되던 중 윤 씨는 '탄원서를 써라'는 검사의 전화를 받았다. 탄원서를 쓰기 위해 공소장을 읽어보았다. 딸을 죽음으로 내몬 잔인한 수법을 확인한 그는 충격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가해자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딸 아이에게 했더군요. 딸이 폭행 당해서 죽을 때까지 얼마나 지옥 같았겠는지, 가슴이 터질 것만 같더군요. 공소장을 본 이후 보름이 넘도록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에 시달렸어요. 병원에 입원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죠."

재판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윤 씨는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았다. 가해자 측 변호사가 '가해자인 10대 여중생들은 20대 남성들의 강요로 피해를 당한 피해자'라며 무죄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재판을 보면서 가해자인 10대 여중생들에게서 반성의 기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어요. 가해자 부모들도 제게 한 번도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윤 씨는 재판 결과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선고했어도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집행유예나 무죄가 선고됐다면 억울해서 살지 못했을 겁니다. 재판부가 저의 심경을 잘 헤아려 형을 선고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후련하지 않네요. 그저 답답합니다." 그는 1심 판결이 나온 뒤 가해자 측 변호사로부터 항소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윤 씨는 어릴 적 보육원에 딸을 찾아갔던 것처럼 딸의 유골함을 2주에 한 번씩 보러간다. "저라도 찾아가지 않으면 딸이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딸을 보고 와야 제 일을 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 딸 같은 피해자가 더이상 나오지 않도록 사회·제도적으로 가출청소년에 대한 보호체계가 마련됐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김해뉴스 /김예린 기자  beaur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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