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탄강설화와 함께 전해져 내려 온 구지가(龜旨歌).
우리 민족의 문헌에 나타난 시가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4구체(四句體)의 한역가(漢譯歌) 형태를 갖고 있다. 한자로는 '龜何龜何(구하구하) 首其現也(수기현야) 若不現也(약불현야)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라고 쓴다. 김해에는 마지막 구절 중 '번작이'를 극단 이름으로 채택한 곳이 있다. '극단 번작이'(대표 조증윤)이다. '극단 번작이'와 그 단원들이 연극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가인소극장을 찾아가보았다.가인소극장의 가인은 가야사람(伽人), 노래하는 사람(歌人), 아름다운 사람(佳人)이란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 극단 번작이의 창작극 '터집잡기'의 세트가 설치된 가인소극장 무대. 조증윤 대표가 극단과 극장을 설명하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1992년 김해 최초 순수민영소극장 출발
조증윤 대표 김해연극 발전 위해 귀향
번작이 둥지 튼 10년만에 연 50회 공연
2005년 문광부 지원 전면 보수공사
별칭 '도서관 옆 소극장'서 연기 투혼

'극단 번작이'의 전용극장인 가인소극장은 분성로 259의 건물 4층에 있다. 김해도서관이 바로 옆에 있다. 가인소극장은 그래서 김해 시민들 사이에서 '도서관 옆 소극장'이란 예쁜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4층에 이르는 계단들의 벽면에는 극단 번작이가 공연한 연극의 홍보 현수막과 포스터들이 붙어있다. 공연 당시의 대사와 연극 내용을 짐작케 하는 문구들도 눈에 들어온다. 

소극장의 문을 열면 실내계단이 보인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음향조명실이 나온다. 음향조명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극장의 내부 구조가 훤히 보인다. 이 공간은 음향과 조명을 조절하는 곳이다. 취재를 한답시고 어물쩍대다 기계의 복잡한 단추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할까봐 얼른 되돌아섰다.

음향조명실 입구 옆에는 극장 내부로 난 중앙계단이 있다. 중앙계단의 양 옆으로 객석이 배치돼 있다. 객석의 등받이는 평상시에는 접어두는데, 공연이 있는 날이면 바로 세운다고 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 소극장에서는 연극 '터집잡기'의 세트 해체를 앞두고 있었다. 무대의 전체 면적은 45.2㎡이다.

연극 '터집잡기'는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김해시 봉황동의 어느 집 마당에서 가야 토기가 발견되고, 그에 따라 가족이 소동을 벌인다는 내용이다. '우리 집 고구마 밭에서도 사발이며 토기가 나오는 걸 봤다'는 유년의 기억과, '김해 땅 어디를 파든 뭔가 나올 것만 같다'는 불안한(?) 혹은 기대에 찬 예감을 가진 김해사람들의 정서를 콕 집어낸 연극이다.

극 중에는 등장인물들이 '변소'를 드나드는 장면이 있다. 이 곳에서 배우들은 쪼그려 앉은 채 연기를 했다. 그 생각이 나 변소 문을 슬며시 열어봤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왠지 서운한 기분이 든다.

▲ 음향조명실에서 바라본 무대 모습.

세트를 지나 무대 뒤로 가 보았다. 무대 뒤에는 천정에서 바닥까지 검은 막이 쳐져 있었다. 객석에서 보면 무대 왼쪽 끝의 검은 막을 커튼처럼 들추고 다른 공간으로 들어설 수 있게 돼 있다. 가인소극장에서 연극을 본 관객들은 무대에서 퇴장하는 배우들이 주로 이곳을 이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검은 막 뒤에는 또 하나의 공간이 있다. 평상시에는 사무실로, 연극 공연 중에는 분장실 겸 출연자 대기실로 사용하는 곳이다. 각본과 연극을 위한 아이디어가 태어나는 곳이니, 극단 번작이의 핵심공간인 셈이다. 이 공간은 매우 좁다. 무대의 가로길이는 그대로이지만 세로의 폭이 많이  좁다. 그래서 긴 복도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은 공간에 컴퓨터, 연극 관련 책, 소품 등이 차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긴 사무실의 양쪽 끝 창문으로는 겨울 햇살이 넘나들고 바깥 풍경도 보인다. 오른쪽 창으로는 김해도서관이, 왼쪽 창으로는 봉황대가 보인다. 그렇다면 가인소극장은 굉장한 곳에 위치해 있는 게 아닌가. 조중윤 대표는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명당자리"라며 환하게 웃었다.

가인소극장은 1992년에 조성된 김해지역 최초의 순수 민영 소극장이다. 김해에서 활동 중인 박경용 수필가가 무대공연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위해 자신 소유의 건물 4층을 통째로 소극장으로 만들었다. 이때만 해도 연극 공연을 하기에는 조명 시절이 충분치 않았다.

그때 1994년에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증윤 연출가가 고향 김해의 연극 발전을 꿈꾸며 귀향했다. 그는 중학교 졸업선물로 영화 '벤허' 표를 받아 부산시민회관에서 난생 처음 영화를 본 뒤 영화광이 되었고, 연극연출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가인소극장 무대에서 청소년연극 '방황하는 별들'(윤대성 작, 조증윤 연출)을 선보였다. 부산과 창원 등지의 극단에서 조명시설을 빌려왔지만, 김해에서 김해 사람들만으로 연극 공연을 하게 된 기쁨이 컸다.

▲ 조증윤 대표
조증윤은 귀향한 그 해에 창작극과 리얼리즘 연극의 활성화를 꿈꾸며 '극단 느을'을 창단했다. '늘 쉬지 않고 연극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이었다. 그는 당시 부원동에 객석 40석 규모의 전용소극장을 마련해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8년에 현재의 가인소극장으로 둥지를  옮겼다. 극단이 상주하게 되면서 가인소극장은 본격적으로 소극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대의 규모를 넓히고, 돈이 생길 때마다 조명기계를 하나씩 구입해 설치하고, 소품을 장만하고…. 가인소극장은 그렇게 진화해 왔다.

가인소극장에 둥지를 튼 극단은 10년 만에 연 50회의 공연 횟수를 기록했다. 그 실적을 인정받아 2005년 문화관광부의 소극장 개선사업에 선정되면서 가인소극장은 전면 보수공사를 단행했다. 지금은 전국의 어느 민간 소극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단정해졌다.

극단 느을은 2004년에 극단 번작이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 대표는 "'구지가'는 한반도 연극의 시원을 증명한다. 구지가는 구지봉에 모인 백성들이 신령한 왕을 맞이하기 위해 부른 노래이다.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 가야인들에게서 고대 제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구지가는 우리민족 최초로 연희적 요소를 갖춘 노래이다. 그렇다면 김해를 한반도 연극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구지가의 '구워서 먹으리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문화를 잘 구워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겠다는 의미로 극단 이름을 '번작이'라 했다. 극단 번작이는 가락국 신화와 김해의 정신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가인소극장과 극단 번작이는 김해 연극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극단 번작이 단원들은 말한다. "좋은 가마터가 있어야 좋은 그릇이 나옵니다. 가인소극장과 극단 번작이는 빚고, 굽고, 깨트리기를 멈추지 않는 도공의 마음으로 우리 시대의 문화를 빚고, 깨트리는 실험을 통해 우리시대의 연극을 구워가고 있습니다."


극단 번작이 사람들이 말하는 '나에게 연극이란'

재미·감동·흥행을 끌어안기 위한 열정적 '사랑과 전쟁'

▲ 조증윤 대표(가운데 빨간 옷·이하 시계방향)와 배아원, 임정현, 박호우, 홍태규, 최보해 씨.
△조증윤(47) 대표
연극은 '1식2찬'이다. 연극 덕분에 식은 밥이라도 먹고 산다. 가끔은 따뜻한 밥도 먹는다. 연극이 '1식3찬'이 되는 날을 꿈꾼다. '재미'와 '감동' 그리고 '흥행'이라는 1식3찬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최보해(45) 행정실장
연극은 '사랑과 전쟁'이다. 첫눈에 반해 시작했고, 껍질을 하나씩 벗겨가는 신비로움이 있다. 한 공연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심장이 콩닥거린다. 그러나 다 벗겨진 무대를 보는 순간 열정적인 사랑을 치른 것처럼 허무해 진다.
△박호우(44) 조명감독
연극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매번 달라지는 수많은 이야기에 빛을 더해주는 것이다.
△임정현(42) 아트디렉터
연극은 새로운 영감을 준다. 정해진 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성향, 연출의 의도, 배우들의 연기와 성격에 따라 매번 바뀌는 매력이 있다.
△홍태규(32) 무대팀장
연극은 '단원모집'이다. 사람이 먼저다, 그리고 사람이 또한 문제이다.
△배아원(22) 막내배우
연극은 '커피심부름'이다. 연극은 '궂은일 마다않기'이고 '선배님들께 욕 얻어먹기'이다. 그렇게 배워도 행복한 것이 연극이다.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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