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광복 후에도 '잊혀진 이들'로 남아
한 세대 지난 뒤 1992년부터 영주 귀국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 4월, 일제가 국가 총동원령을 내려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용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강제 징용은 더욱 심해졌다. 아들을 대신해 아버지가, 장가 간 형을 대신해 동생이 자원해 사할린 행을 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할린은 일본 홋카이도 위, 러시아 대륙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길쭉한 섬이다. 1905년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일본 영토가 됐다. 과거에는 무인도였고 19세기에는 죄수들을 보내던 '지옥의 섬'이었다. 이런 사할린에 6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끌려갔다. 사할린에 끌려간 사람들은 주로 20대 안팎의 젊은 남성들이었다. 징용된 사람들은 사할린 남쪽에 있는 탄광에서 일을 했다. 일본인 감독 아래에서 고된 탄광 일을 하면서 매를 맞기도 하고,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본인들은 약속한 보수를 주지도 않았고, 2년 뒤 고국으로 보내주지도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조선의 처자식들이 남편, 아버지를 찾아 사할린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러시아는 사할린 섬을 되찾게 됐다. 사할린 동포들은 광복의 기쁨은커녕 더 큰 시련에 부닥쳤다. 일부 일본인들이 동포들을 집단 학살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자국 국민들만 일본으로 귀국시켰다. 일본인들의 뒤를 이어 들어온 옛 소련인들은 동포들에게 계속해서 탄광 일을 시켰다. 당시 옛 소련은 전쟁 후유증으로 식량 공급이 마땅치 않았고, 동포들은 해방 전보다 더 힘든 삶을 살게 됐다.

이후 수십 년의 시간과 세대가 지나면서 동포들은 러시아 사회에 녹아들었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버릴 수 없었다. 조국으로의 영주 귀국은 1992년이 돼서야 성사됐다. 일본 정부가 보상·위로금을 일부 지급했고, 우리나라 정부도 이들을 위해 거주지를 마련하고 생활비를 지원했다. 강제 징용 당사자인 부모 세대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고, 흰 머리에 주름이 가득한 2세대 중 일부만 부모의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