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하고 담담한 선, 서예와 그림 양수겸장

분산 아랫쪽으로 난 산복도로를 따라 김해 동상동 '김해고 동문회관'으로 간다.
 
계단에서부터 먹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먹냄새를 따라 2층으로 올라 가니 '서화갤러리'와 '서화연구실'이다. 자그마하고 소박한 갤러리. 어린이들의 그림이 전시돼 있고, 실내에서는 너댓명이 조용히 붓글씨를 쓰고 있다. 교복을 입은 여고생에서부터 중년 남성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먹'에만 집중하고 있다. 새롭고 낯선 풍경이다.
 
연구실 한 켠에 마련된 자그마한 방 곳곳에는 글과 그림이 걸려있고, 책상 위에는 언제든 글을 쓸 수 있도록 먹과 붓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먹냄새가 유난히 진한 이곳, 서예가 범지 박정식이 주로 거처하는 방이다.
 
범지는 자주 '허허허'하고 웃는데, 그럴 때는 눈이 반달이 되고 눈꼬리에 주름이 진다. 그 모습은 담백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맑아 꼭 수묵화를 닮았다. 워낙 어릴 때부터 글씨를 써왔기 때문일까?
 
▲ 덕산복거(德山卜居)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붓을 잡았다. 담임 교사가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 · '석류껍질 안에 들어 있는 씨 모양이 붉은 구슬처럼 빛난다'는 뜻으로 율곡 이이가 3살 때 읊은 말)'라는 글자를 주고 범지에게 써보라고 한 게 계기가 됐다. 그는 (그 글로) 김해군 대회에서 수상을 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서예에 관한 상이란 상은 거의 다 휩쓸었다.
 
지난 1994년은 범지에게는 서예의 길에 한 획을 그은 해이다. 그는 그해에 34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 당시 수상소감은 이랬다.
 
"'소년문장'은 있어도 '소년명필'은 없다고 하는데, 제가 이 (앳된)나이에 이런 상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부담감은 예상 외로 컸고, 결국 3년 정도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그때 받은 상은 그 순간 잘 해서 받은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글에 매달렸다.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전부 다시, 꾸준히 연습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지난 1999년, 첫 개인전 '휘운회취', 즉 '쓰고 그린 것을 많이 모은다'는 뜻의 전시회를 열었다. 8폭 병풍 3점과 각 서체를 두루 쓴 서예작품 25점, 문인화 20여 점, 전각 작품 등 을 선보였다.

범지, 그의 하루는 변함이 없다. 아침 7시까지 연구실에 나와 3시간 동안 글을 쓴다. 먹을 갈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챙겨두었던 좋은 글귀를 떠올린다. 작업이라는 개념보다는 손의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책 베껴쓰기를 주로 한다. 그의 책상 옆에는 새 종이가, 아래에는 글을 쓴 종이가 수도 없이 쌓여있다. 그가 먹과 보낸 시간의 흔적이다.
 
▲ 석삼덕(石三德)
그는 문인화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문인화로 '경남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문인화는 전문적 화가가 아닌 문필가들이 그린 것으로, 문학적 소양이 많이 드러나는 단순한 그림이다. 그는 간결하고 담담한 선으로 사람의 얼굴, 붓, 꽃 등 온갖 것을 다 그린다. 그림은 언제부터 배웠냐고 물으니, 원래는 서예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려 했었다고 답한다.
 
"원래 미술과를 가기 위해 그 방면으로 공부를 했죠. 그런데 그림의 밑바탕이 글씨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고, 글씨 연습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그림과 글씨를 구별하는 일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글씨가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글씨가 되는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로 '화(花)와 조(鳥)'라는 작품은 꽃그림과 새그림으로 각각의 한자를 표현했다.
 
지난 4월 '서화갤러리'에서 열었던 개인전 '필(筆)!도판(陶板)속으로'에서는 도판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 종이에 쓰는 것보다 쉽지 않겠냐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도판에 쓴 글씨는 바로 나타나지 않고 유약을 발라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쓰는 순간 더욱 집중을 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새로운 시도를 했고 반응도 좋았지만 그는 "서예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종이에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범지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는 '사야(史野)'. 고운 것과 거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논어> '옹야편'에 그 말이 나온다.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연후군자(子曰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부드러운 것과 거친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좋은 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용'의 뜻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지요."
 
▲ 화(花)와 조(鳥)
이 글귀는 '청우마묵회' 회원들이 글을 쓰는 연구실에도 붙어 있다. '청우마묵회'는 날씨가 맑으나 비가 오나 항상 먹을 간다는 의미로, 지난 1986년부터 지금까지 범지의 지도를 받고 있는 서예 모임이다. 말하자면 '후학(後學)'인 셈이다.

요즘에는 20여 명이 이런저런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러 온다. 그는 "글을 쓰려는 사람은 누구든 환영한다"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인다.
 
"요즘에 글을 배우려 하시는 분들을 보면 자꾸 빨리빨리 하려고만 해요. 서예는 '느림의 미학'인데 말이죠. 기본적인 단계까지만 차근차근 배우면 그 이후로는 실력이 빨리 늘어요. 그런데 그 기본적인 단계에서부터 급하게 배우려 하니, 중간에 붓을 놓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는 또한 인제대 평생교육원과 장유문화센터, 김해문화원에 출강을 나가기도 한다. 자신의 작업에 정진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일에 소홀하지 않다는 얘기다.
 
10세 이후로 붓과 먹을 벗삼아 살아온 범지는 '마음가짐'을 특히 강조한다. 그래서 그에게 서예란 '사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 삶이 묻어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다시 그의 글을 본다. 범지의 담백하고 맑은 삶이 오롯이 들여다 보인다. 한편 범지는 지난 11월 27일부터 오는 10일까지 경남 일원의 서예가 8명이 각자의 작품 두 세 점씩을 소개하는 <오도행(吾道行)>전에 참여하고 있다. 


 

▲ 범지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먹과 붓.
범지는  

범지 박정식은 1962년 김해시 상동면 묵방리에서 태어났다. 그 후로 지금까지 김해를 떠나본 적이 없는 '토박이'다.
 
그의 호 '범지(凡志·凡之)'는 애초에는 지난 1990년에 친구가 '불경 범(梵)'자를 써서 지어준 것인데, 범지 자신이 뒷날 '무릇 범(凡)'으로 바꾸었다. '평범하게 시작하지만 훗날에는 비범하게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지난 1999년부터 지금까지 총 5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100회 이상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지난 1994년에는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경남서예대전' 초대작가와 운영위원·심사위원을,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을 각각 역임했다.
 
범지는 각종 휘호를 쓰기도 했는데, 은하사 범종루, 가산 김종출 선생의 문학비, 국립김해박물관 가야누리, 김해읍성 북문인 공진문 등에서 그의 글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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