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그림을 시작한 분들을 도와주고, 그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갖기도  하는 시간이 마냥 행복합니다."2000년에 김해문화원에서 '소묘와 유화' 교실을 열어 재능봉사활동을 시작한 화가 유은경(59). 주부 화가인 그는 "그림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족의 배려와 이해 덕분에 가능했다.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분들도 주부들이다. 그들과 끝까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다. 

중·고교 시절 미술교사로부터 자양분
미술교육과 진학 후 유화 등 본격 활동
김해문화원서 '소묘와 유화' 재능봉사
인제대 평생교육원 강의하며 제자 육성
김해미협 소속 화가 8명이나 배출
"배움 원하면 언제든 누구든 도와주려"


유은경의 작업실은 외동 성원아파트에 있다. 그에게 그림을 배우는 '그림사랑회' 회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아파트이지만 살림 공간은 아니다. 방 한 칸은 그림을 모아둔 수장고이다. 그림 소재를 자연에서 많이 찾는다는 유은경의 그림도 이곳에 보관돼 있다. 그의 꽃 그림은 향기가 날 듯 싱그럽고 아름답다. 나머지 방 두 곳에는 이젤이 펼쳐져 있다. 주방은 차를 끓이는 용도로 쓰이고, 거실의 테이블도 앉아서 차를 마시는 장소에 그치는 듯하다. 냉장고를 여니 물감을 짜놓은 회원들의 팔레트가 차곡차곡 쌓여 있어 깜짝 놀랐다. 냉장고 사용법의 새로운 발견이다.

▲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과 끝까지 동행할 겁니다." 유은경 화가가 그림사랑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박나래 skfoqkr@

유은경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수색초등학교 시절에 그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유명했다. "당시에는 여자아이들의 놀잇감으로 종이인형이 인기였죠. 인쇄된 옷이 몇 벌 안 되니 아이들은 더 많은 옷을 가지고 싶어했는데, 저는 늘 그 인형 옷을 그리느라 바빴어요.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옷 그림을 그렸답니다. 친구들이 주위에 둘러서면 더 신이 나서 그렸죠. 연필로 그렸지만 예쁘게 그리느라고 리본도 크게 그려 넣고, 꽃무늬 별무늬로 장식했지요. 드레스의 질감이 느껴지게 고민도 하면서요. 미군부대 다니는 아빠를 둔 친구가 좋은 종이나 고급연필을 가져다주면 특별히 신경 써서 그려주곤 했어요."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중앙여자중학교·고등학교에서 그는 평생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양분을 준 이춘기 미술교사를 만났다. "거의 6년 동안 이춘기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서울대학교 미대 출신이었어요. 주말마다 미술부원들을 데리고 갤러리를 다니면서 전시회를 보여주셨지요. 신문회관, 신세계백화점 갤러리, 덕수궁 옆 시립미술관…. 선생님 덕분에 저는 중학교 때부터 국전을 보았어요. 중앙여중·고는 전인교육을 목표로 했고, 예술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썼어요. 여고에 관현악단이 있었을 정도였죠."

그는 학교 자랑을 이어갔다. "연극이나 음악회의 입장권을 매점에서 팔았을 정도로 수준 높은 학교였어요. 친구들과 함께 입장권을 사서 주말마다 보러 다니곤 했지요. 아마 지금도 이 정도 교육을 시행하는 학교는 흔치 않을 겁니다. 저로서는 마음껏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고마운 시기였지요."

유은경은 좋은 시설의 학교에서 훌륭한 교사들을 만나 평생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질을 배웠던 소녀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결혼 전까지 그렇게 주말이면 미술, 연극, 음악 등을 마음껏 접하며 살았다.

▲ 작업실의 작은 수장고 바닥까지 차지한 그림액자.
"어머니가 그림에 재능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셨죠. 당신께서 못 하신 걸 제가 하니까 그랬던가 봐요. 제가 종이나 물감, 붓을 사야 한다고 하면 바로 돈을 주셨지요. 돈을 어머니 몰래 많이 떼어먹기도 했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확인하지 않으셨어요. 어쩌면 알고 계셨는지도 모르죠." 그림을 사랑했던 어머니는 그림을 잘 그리는 딸을 그렇게 아꼈던 게 아닐까.

유은경은 경인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수채화를 그렸고, 대학에 가서 김기숙 교수님에게서 유화를 배웠지요. 미술교육과에서는 교육학, 아동심리와 미술실기를 함께 했어요. 학습량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래도 교수님과 함께 속리산, 설악산, 동해안 등지로 스케치 여행을 다녔어요. 텐트를 가지고 2박3일 정도 여행을 다녀와서는 작품을 완성해 학교 체육관에서 소품전도 열고, 야외스케치전도 열었지요."

고등학교 때까지 수채화를 그렸던 그는 유화를 수채화처럼 맑게 그려냈다. "수채화와 유화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요. 두 가지 기법을 모두 사용했지요."

유은경은 유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화는 물감을 섞어서 자기만의 색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색을 제대로 섞는 데에만 몇 년이 걸립니다. 같은 하늘이고 바다라고 해도 봄, 여름, 가울, 겨울마다 색이 다 달라요. 다르게 표현해야지요.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면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릅니다. 몇 년 지난 후에 '그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알겠다'고 말하지요."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색을 물었다. "대학 시절에는 깊고 강한 느낌이 나는 감청빛의 '프러시안 블루', 짙은 산호빛의 '코랄 레드'를 좋아했어요. 결혼을 하고 나서는 '울트라 마린'을 좋아하게 됐어요. 울트라 마린은 흰색을 섞어 사용하면 색감이 변화무쌍하게 일어나지요."

▲ 수장고 선반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그림액자들.
유은경은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도 색을 섞어 조절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익히게 한다. "제가 처음 유화를 그릴 때에는 12가지 물감이었는데, 요즘은 68가지 물감이 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색을 잘 섞는 게 중요합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나만의 색을 찾는 것, 그것이 예술이죠. 기초를 같이 배워도 성격이나 기호에 따라 모두 다른 색으로 다르게 그리는 거지요."

그는 공무원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창원으로 이사를 와 20년 정도 살았다. 2009년에는 장유로 이사를 왔다. 창원에 살 때도 김해는 무시로 다녀갔다. 2000년 김해문화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소묘와 유화' 교실을 열어 재능봉사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유화를 가르치다가 지금은 인제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10년 넘게 그와 함께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김해의 제자들은 40여 명에 이른다. 중도에 그림을 그만둔 사람들까지 친다면 300여 명은 된다. 15년 여 세월 동안 김해의 미술을 위해 싹을 뿌리고 꽃을 피워온 것이다. 

"처음에는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분들,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었지요. 이제는 함께 그림을 그리는 동반자입니다. 김해문화원에서 그림을 배운 초창기 제자들 중에 김해미술협회에 속한 화가가 8명이나 있어요. 늦게 시작했지만 결국 화가가 되어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들을 생각하면 뿌듯합니다."

유은경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화실 안에서는 제자들 여러 명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제자가 아니라 동반자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유은경을 중심으로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그들은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다웠다. 유은경은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힘이 닿은 한 계속 그림을 그려야지요. 우리는 주부니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응원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가정을 가장 소중히 하면서 그림을 그려야지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분들을 도와주고, 함께 그리고, 동행하는 겁니다."

▲ 유은경(앞줄 왼쪽·이하 반시계 방향) 화가와 김경림, 박수원, 류원미, 이영아, 조수미, 송미영 회원.

≫유은경
한국미협·김해미협 회원, 비투회장, 여-유회·그림사랑회 지도교수. 인제대 평생교육원 유화교수, 전 김해문화원 소묘 및 유화 강사. 경남여성미술대전 공모전 심사위원, 김해미술대전 심사위원. 개인전/서울무역 전시장, 성산아트홀, 김해문화의전당, 서울 한국미술관. 초대전/주나미 아트스페이스, 창원컨벤션센터(람사르총회기념 특별전), 대우백화점 갤러리 등. 단체전/한국미협 정기전, 비투회전, 여-유회전, 대구회화전, 누드크로키전, 청록회전, 서울국제현대미술제 등 다수.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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