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가 왕으로 추대된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보자. 수로와 관련하여 빠질 수 없는 인물이 탈해다. 탈해는 수로에 도술 경쟁이라는 이야기로 표현된 일화에서 보듯 수로에 패한 인물이었다. 이는 도술뿐 아니라 유사한 정치·경제적 바탕에서 경쟁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패배하였는데도 신라에 가서 왕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만큼 수로의 세력이 출발점에서는 신라(사로국) 초기의 그것에 비해 강력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도 구산동에 남아 있는 300t이 넘는 거대한 고인돌과 김해 율하지구 고인돌 등은 구간 사회만 해도 상당한 정치권력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러한 구간들이 새로이 수로를 추대하여 가락국을 세운 배경에는 당시로는 최첨단 소재인 철의 생산과 유통을 제외하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여기에서 출발한 수로의 가락국은 필연적으로 낙동강과 연안항로를 지배하고 왜와 한, 낙랑 등 머나먼 이국에 철을 수출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당시의 김해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웠을지 상상해 보자.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로 보아 가락국이 성립된 시기부터 최소 400년 간 왜국(일본)에서는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 없었고 단지 소재를 가지고 가공만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경제적 가치로 환산을 하면 당시 가락국이 얼마나 풍요로웠을지는 충분히 짐작만으로도 남음이 있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는 무엇이었을까? 김해는 당시 철을 매개로 소금과 해산물의 내륙 교역을 통제한 중요한 물류중심지의 역할을 하였다. 고령과 창녕 등 내륙 곳곳의 큰 무덤에서는 해산물, 심지어는 오키나와산 조개로 만든 도구와 일본제 기, 일본에서 잘 자라는 녹나무제의 배모양 목관 등이 발굴되어 국내·외에 떠들썩하게 소개된 적이 있다. 이 모든 물자의 중간 기착지는 김해였을 것이다.
지금껏 30년을 공부해 오면서 느낀 점은 단편적 기록이지만 기록에 있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점이다. 수로왕릉에 인접한 곳에서 기원 전후의 수장급 무덤이 발굴된 점과 김해 김 씨의 명맥이 유지된 점은 지금의 수로왕릉이 결코 허묘가 아니라 제 자리임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구간에 의해 추대된 수로와 가락국의 실체는 모호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대성동의 낮은 구릉에서 삼국의 왕릉에 결코 뒤지지 않는 규모의 화려하고 다양한 부장품을 가진 무덤이 수십 기 발견됨으로써 가락국에서 금관가야로 이어지는 가야의 역사는 세상 사람의 눈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홀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김해는 금관가야의 위대한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이다. 시민들은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김해시도 가야역사와 유적·유물을 콘텐츠로 제대로 활용한다면 김해는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의 도시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