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지의 글은 편하다는 말을 듣는 게 가장 좋습니다." 청우마묵헌에서 서예가 범지 박정식이 글씨를 쓰고 있다. 김병찬 기자 kbc@
수로왕릉 후원을 정원처럼 안은 서예실
마음과 인성을 어루만지는 그윽한 묵향

오로지 글씨만 생각하고 고집했던 시간
32세  때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 수상
자만하지 말자고 스스로 엄한 채찍질
"나이 드니 글씨도 편안해지는 것 같아"

2014년 한해 개인전·그룹전 등 총 17회
"새해에도 그저 '글씨 바보'로 살고 싶어"

"삶의 연륜이 배어있는 글씨라야 좋은 글씨다." 서예가 범지 박정식(53)은 1994년에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32세. 대한민국 서예대전 사상 최연소로 큰 상을 받았다. 일찍 큰 상을 받은 게 오히려 부담이 됐다는 그는 지금은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글씨를 쓴다고 한다. 그는 "마음이 편해야 글씨도 좋고, 보는 사람도 편하다"고 말한다. 그가 서예를 하고 문인화를 그리는 '청우마묵헌'을 찾아가보았다.

맑은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먹을 갈며 서예에 정진한다는 의미의 '청우마묵헌'은 가락로 125번길 28에 있다. 수로왕릉 후원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오전 무렵, 청우마묵헌 앞마당에는 햇살이 가득 퍼져 있었다. 수로왕릉 후원에서는 연신 까치 소리가 들려왔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는 생각을 한다"며 박정식이 앞마당까지 마중을 나왔다.
 

▲ 햇살이 가득 비춰드는 청우마묵헌 전경.
청우마묵헌으로 들어서기 전에 큰 유리창에 붙은 '서예는 심리를 다스리고 서예는 바른 인성을 기른다'는 글이 먼저 보인다. 마음을 닦고 글씨를 쓰는 공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윽한 묵향이 풍겨온다. 청우마묵회 회원들의 서예 도구, 벽에 붙은 글귀, 서예 관련 도록, 전시회 팸플릿 등이 가득하다. 입구 쪽 작은 응접공간이 손님을 맞는 곳이다. 유리창을 통과해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롭다. 2층은 작은 갤러리 겸 큰 응접실로 쓰고 있다. 3층은 살림집이다.
 
박정식은 상동면 묵방마을에서 태어난 뒤 줄곧 김해에서 살고 있는 '김해 토박이'이다. "어르신들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마을 사랑방은 작은 서당이었지요. 마을 어르신이 한자를 가르쳤는데, 초등학교 시절 거기에서 천자문을 익히곤 했습니다."
 
그가 처음 붓을 잡은 건 초등학교 3학년 서예시간이었다. "형님이 부산에서 문방구를 하고 있어서 친구들에 비해 제법 그럴 듯한 붓, 벼루, 먹을 갖추었지요. 먹을 먼저 갈고 먹물을 찍어 글씨를 쓰는데, 이거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무궁화 삼천리' 같은 글자를 썼지요. 고전경시대회가 열렸을 때 붓글씨를 써서 상을 받았어요. 붓글씨를 시키면 되겠구나 싶었던지 담임선생님이 방과 후에 따로 지도를 해주셨습니다. 김해군 학예발표회 때 학교 대표로 나가곤 했습니다."
 
김해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미술선생님이 "붓글씨 써 본 학생 없냐"고 물었다. 친구들이 너도 나도 그를 추천했다. "중학교에 가니 종이도 커지고, 써야 할 글자 수도 많아지더군요. 당시에는 김해에 서예학원도 없었고, 서예를 잘 아는 선생님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알아서 익혀야 했지요. 서예체본을 얻기도 하고, 사기도 하고…. 중학생 시절에는 김해군을 대표해서 경남 학예발표회에 나갔지요."
 
박정식이 김해고등학교 2학년 때 김해에 처음으로 서실이 생겼다. 당시 경남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유원철 씨가 쓰던 서실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붓글씨를 가르쳐 준 선생님에 이어 두 번째 스승을 만난 겁니다. 요즘처럼 단계별 프로그램이 없던 시절이라 자유롭게 썼어요. 구속받지 않고 글씨를 쓰는 기분을 그때 맛보았지요."
 
고등학교 시절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서예밖에 없었다. 교사들로부터 "공부는 안 하고 글씨만 써서 어쩔 셈이냐"는 걱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교사들은 그의 글씨를 인정했다. 그는 매일 아침 교무실에 갔다. 학교의 수업시간표, 하루 일정표를 칠판에 정서하는 게 그의 아침일과였다. 전체 조례가 열리면 친구들이 "오늘 또 정식이 상 받나"라고 할 정도로 각종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붓글씨가 좋다. 이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즈음이다. "남들이 공부하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나는 글씨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때 글씨에 미쳐있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시절 김해읍에서 직장을 다니는 누나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죠. 하루는 묵방마을의 본가에 가서 잠을 잤어요. 그날 밤 마침 옆방에 이웃집 아주머니가 와 있었어요. 제가 잠을 자는 동안 '하, 그 병풍 글씨 참 좋다' 하면서 잠꼬대를 하는 걸 들었던가 봅니다. 다음날 아주머니는 제게 '니, 요새 와 그라노'하면서 걱정하시더군요. 그 정도로 글씨만 생각했습니다."
 
집에서도 걱정과 반대가 많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글씨만 쓰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공무원 시험을 권했다. 아버지는 "글씨로 밥을 먹으려면 마흔은 넘어야 한다.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반대를 했다.
 
"나이 스물이었을 때이니 마흔이 어떤 의미인지도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그저 글씨만 쓰고 싶었지요. 그 무렵 우연히 <월간 서예>에서 취묵헌 인영선 선생의 전서작품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확 와 닿았습니다. 회화적이고 색다른 느낌이었지요.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마침 선생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현 서예박물관)에서 교육과정을 개설했습니다. 서울을 오가며 공부했지요."
 
취묵헌은 박정식의 세 번째 스승이자,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구포로 가서 오전 6시 30분 무궁화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오후 12시 30분. 2시간 수업을 받고 다시 김해로 돌아오면 늦은 밤이었다. 일주일에 2번 서울을 오가며 공부하기를 3년 동안 계속했다. "직장생활 하는 형님과 자취를 했어요. 서울로 오가는 차비 등 뒷바라지를 형님이 다 해주셨어요. 대신 저는 열심히 밥도 하고 형님 도시락도 싸고…. 나머지 시간에는 오로지 글씨만 썼지요. 취묵헌 선생이 처음 저의 전서를 보시고는 '전서를 좀 써 봤니'라고 물어보시더군요. 처음 써본다고 했더니 '처음 쓴 전서가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취묵헌도 범지의 글씨를 인정했던 것은 아닐까.
 
"김해와 서울을 오갔지만 배우는 재미에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떻게 그렇게 다닐 수 있었던지…. 취묵헌 선생은 제 사정을 알고는 나중에 수업을 1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고 시간을 늘려 가르쳐주셨지요. 대신 숙제가 많았어요. 3년 과정이 끝나고 난 뒤에는 천안의 자택으로 한 달에 한 번 공부하러 갔습니다. 선생은 저를 제자가 아니라 동도로 대우해주셨지요." 동도(同道)는 같을 길을 함께 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던 박정식은 1994년에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32세. 너무 빨리 큰 상을 받았지요. 서예협회에서 명함판 사진 20장을 준비하라고 연락이 왔더군요. 신문사에 줄 보도자료에 필요했던 거지요. 저야 뭐 얼떨떨했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는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지요. 최연소라고 신문마다 다 났어요. 아버님은 그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큰 상을 받고 나자 작은 글씨 하나를 써도 사람들은 '대상 받은 사람 작품'이라고 주목했다. "그 부담이 컸던지 한 3년 정도는 슬럼프에 빠졌지요. 그러다가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그 순간의 상이다. 영원한 상이 아니다'라는 걸 알았지요. 큰 상을 받고 끝까지 활동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자만하지도 않고, 의식도 하지 않고 열심히 써야 하는 거지요. '인서구로'라는 글귀를 늘 생각합니다." 인서구로(人書俱老)는 중국 당나라 때 초서의 대가인 손과정(孫過庭)이 한 말이다. '사람과 글씨가 모두 늙는 때에 이를 것이다', 즉 '세월이 흘러야 비로소 좋아진다'는 의미이다. "이제는 좀 편안합니다. 그러니 글씨도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범지의 글은 편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박정식은 오전 6시 수로왕릉 후원의 새소리를 들으며 일어난다. 아침운동 삼아 분성산이나 만장대나 해반천을 1시간 정도 걷고 집으로 돌아와 8시쯤 식사를 한다. 9시면 어김없이 청우마묵헌 1층에 '출근'한다. 장유문화센터와 인제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출강을 나가는 것 말고는 종일 청우마묵헌에서 오후 9시까지 글씨를 쓴다. "자유롭게 보이나요? 12시간 근무입니다." 박정식은 그 말끝에 또 웃었다. 2014년 개인전인 '일도낭화전'과 그룹전 16회를 치러 낸 그는 2015년 그룹전을 준비 중이다.
 
"글씨만 쓰느라 다른 취미는 아예 못 가졌습니다. 바둑도 못 두죠. 운전도 어떻게든 안 하려 했는데, 출강 때문에 할 수 없이…. 허허. 오직 글 씨 쓰고 그림 그리고. 서화는 제 삶입니다. 밥이고, 사랑이고, 모든 것이지요. 요즘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 많은 세상이라지만, 저는 그저 '글씨 바보'입니다."


▲ 범지 박정식.
≫범지 박정식
근역서가회, 한청서맥, 한국서예정예작가협회, 한국서예협회 이사, 경남서예협회 이사, 개인전 8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 수상(1994),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 동아미술제 동우회 초대전, 경남서예대전 초대작가, 심사·운영위원 역임, 경남·경북·부산·정수·매일·캘리그래피 서예대전 등 심사위원 역임. 세계서예대전 전북 비엔날레 본 전시, 특별전. 서예정신 2009 서울전 외 초대전, 기획전 200여회. 김해미협 지부장 역임, 김해서협 초대지부장 역임.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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