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3대 간신 중 한 명 김자점
손부 효명옹주와 함께 갖은 횡포
내삼리 백성들 옥토 뺏기고 부역
암행어사 상소에 "본때 보여주마"
결혼 앞둔 청년 주동자 몰아 죽여
스님, 주인 잃은 나무기러기 이용
"날개 돋으면 일을 도모해야 하오"
김자점, 꾐에 빠져 모반 후 몰락


1. 조선 인조 말엽, 주촌면 내삼리 자지마을(紫峴). 주씨(周氏) 노인은 나무기러기 한 쌍을 끌어안고 쪽마루에 앉아 있었다. 민가에서 아들이 혼기가 차면 손수 깎게 하는 나무기러기였다. 한 번 짝을 지으면 죽을 때까지 인연을 이어가는 기러기처럼 부부가 백년해로하기를 기원하는 풍습이었다.
 
이른 봄에 주 노인은 아들에게 잘 마른 박달나무를 구해주었다. 어미 없이 헌걸찬 장정이 된 열일곱 살 부들은 가을이 되면 이웃 원당마을 여울이와 혼례를 치르기로 되어 있었다. 부들은 신이 나서 나무기러기를 깎았다. 여울이는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지만 몸이 실하고 부지런했다. 그런데 혼례를 두 달 앞두고 부들이가 어이없이 명줄을 놓아버렸다. 부들이의 주검을 본 여울이는 마을 앞 삼백천지(三百川池: 내삼지)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주 노인은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절통했다. 주먹으로 땅을 치고 어금니를 깨물어도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주 노인은 매일매일 나무기러기를 껴안고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몸속에 남아 있는 울음을 다 토해낼 수 없었다. 이른 가을 맑은 햇빛이 내리쬐는 마당에 주 노인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가득 찼다.
 
하나 뿐인 아들을 잃고 주야장천 울기만 하는 주 노인이 딱했지만 자지마을 사람들은 멀찌감치서 혀만 찰 뿐,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 주 노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부들이와 한 패로 간주하겠다는 지장(知壯)의 엄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장의 말이라면 부사도 거역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래서 주 노인을 위로해주지도 못했고, 죽 한 사발 끓여다 줄 수 없었다.
 

▲ 그림= 정원조 화가
주 노인은 나무기러기와 함께 아들 곁으로 갈 작정이었다. 곡기를 끊은 지 벌써 여러 날이었다. 세상에 아무 미련이 없었다. 눈물이 흐르기를 멈추지 않더니 마침내 주 노인은 나무기러기를 껴안은 채 모로 쓰러졌다. 지나가던 이웃이 쓰러진 주 노인을 발견했지만 사립 밖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지만 누구 하나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뒤늦게 누군가가 주 노인을 들쳐 업고 집 밖으로 나왔다. 부들이와 함께 지장에게 붙들려가 매를 맞았지만 용케 목숨을 건진 숫돌이었다. 숫돌이의 몸도 아직 성치 않았다.
 
"어쩌려고 이러나? 이러다간 자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야."

"그렇다고 동무 아버지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숫돌이는 주 노인을 업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자주색 흙이 고운 고개를 넘고, 또 하나 고개를 넘어서 숫돌이는 산골짜기에 있는 암자로 갔다. 암자에는 낡은 승복을 입은 나이 많은 중이 머물고 있었다. 숫돌이는 중에게 주 노인을 맡아줄 것을 청하고 곡절을 말했다.

내삼리는 가락국 시대부터 법판(法判:왕에게 바치는 쌀)을 재배하던 헌곡전(獻穀田)이 있을 정도로 쌀이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황새봉에서 발원한 물이 삼내폭포(內三瀑布:내삼폭포)에서 절경을 이룬 뒤 세 갈래 개천으로 흘러 조만강과 서낙동강에 이르기 전에 대두소류지와 용안소류지에서 잠시 머무르며 자지마을(紫峴)과 지내마을(池內), 원당마을(院塘)에 비옥한 농경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 내삼리에는 오랫동안 양반 세도가들의 전장(田莊)이 있었다. 전장은 원래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한 체제에서 왕이 신하나 지방의 학사(學舍), 서원, 사찰 등에 하사하는 땅이었으나, 점차 세도가들의 대규모 농장 형태로 바뀌었다. 세도가들은 전장이 있는 지역에다 농사에 필요한 장비와 수확물을 보관하는 시설인 장사(莊舍)를 세우고 관리인 격인 지장(知壯)을 두었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내삼리의 전장은 대부분 김자점의 손에 넘어갔다. 새 임금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자점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가 드높았다. 삼백천지 바로 옆에 장사를 짓고 지장을 두니, 자지마을 사람들은 김자점의 전장을 관리하는 지장의 명이 있을 때마다 부역 아닌 부역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자기 농사는 망치기 일쑤였다.
 
그리고 어느 해부터 전장의 주인은 김자점의 손부(孫婦) 효명옹주로 바뀌었다. 인조와 귀인 조 씨에게서 태어난 효명옹주가 주인이 되고부터 전장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미 경작지를 개간한 둔전(屯田)을 전장에 포함시키고도 세금 한 푼 내지 않았으며, 해마다 고리채를 놓아 마을사람들의 토지를 빼앗았다.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민들에게는 절반이 넘은 소작료를 내게 했을 뿐 아니라 노비처럼 부려먹었다. 그보다 기막힌 일은 삼백천지의 물을 전장에서 관리하면서 가뭄이 들어도 농민들에게 나눠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삼리 사람들은 여러 차례 김해부사에게 효명옹주 전장의 횡포를 바로잡아 줄 것을 간청했지만 김해부사는 임금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김자점과 효명옹주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의 원성은 효명옹주를 넘어 김자점에게로 향했다.
 
그러던 차에 경상도 암행어사가 김해부에 떴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지마을, 지내마을, 원당마을 사람들은 어떻게든 암행어사를 만나 전장의 횡포를 알리기로 했다. 부들이는 숫돌이와 여러 청년들과 함께 암행어사의 행적을 쫒았다. 그리고 어렵사리 암행어사를 만나 그동안 효명옹주의 전장에서 벌어진 일을 낱낱이 고했다. 김해부사까지 전장의 횡포를 관리 감독하기는커녕 이를 묵인하거나 동조하였으므로 중앙정부에서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주기를 호소했다.
 
경상도 암행어사 임선백(任善伯)은 청년들의 호소를 듣고 한양으로 올라가 이를 즉각 상소했다. 효명옹주가 내삼리 전장에서 농민들을 불법착취하고 있으니 시정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임선백의 상소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삼리 사람들이 전장의 일을 고자질하였다 하여 효명옹주의 미움을 사게 만들었다. 효명옹주는 마을사람 모두를 어찌 할 수 없으니 일을 주동한 청년 몇을 붙잡아 물고를 내라는 밀명을 내렸다. 김해부사의 비호 아래 전장의 지장은 부들과 숫돌이 등 다섯 명의 청년을 장사에 가두고 심하게 매질을 했다. 그 중에서도 부들이는 주동자라 하여 몹시 심하게 다루었는데,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한 부들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런데도 쉬쉬하면서 마을사람들에게 주 노인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이 나무기러기 한 쌍은 제 동무 부들이가 장가들 때 쓰려고 직접 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만 주인을 잃고 말았지요."
 
2. 숫돌이가 돌아간 뒤 중은 나무기러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정성스럽게 깎은 나무기러기가 금방이라도 주인을 따라 하늘로 훨훨 날아갈 듯했다.
 
"가련한지고. 쯧쯧."

중은 나무기러기를 불단에 놓고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었다. 사흘이 지난 뒤 주 노인이 깨어났다. 중은 주 노인에게 몸을 잘 돌보라 이르고, 암자를 떠났다. 한양으로 간 중은 김자점에게 나무기러기 한 쌍을 전했다. 괴이쩍게 여기는 김자점에게 중이 말했다.

"꽃이 곱기로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소이다. 대감의 권세가 지금 하늘을 찌르지만 언제 땅으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이 나무기러기에 날개가 돋으면 때를 놓치지 말고 일을 도모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부귀영화가 물거품이 될 것이오."

"누가 감히 내 자리를 넘본단 말이오? 그건 죽은 나무로 깎은 이 기러기에 날개가 돋는 일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오."

김자점은 난데없는 중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나무기러기 한 쌍을 서가에 올려두고 들며날며 쳐다보면서 중의 말을 곰곰 되새겼다.

"꽃이 곱기로 열흘을 못 넘기고,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

모략가인 김자점은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조귀인(趙貴人)과 사돈을 맺고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조귀인의 딸인 효명옹주를 손부로 맞이하여 왕실과도 인척이 되어 세도가 임금 부럽지 않았으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조귀인이 아들 숭선군(崇善君)의 세자책봉을 지원하여 계속해서 권력을 나눠 갖자고 했지만 김자점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영악하고 모사를 잘 하기로 김자점에 뒤지지 않는 조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자점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 돌아온 소현세자가 병으로 죽자 소현세자빈 강 씨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어린 두 아들도 귀양을 보낸 뒤 죽여버렸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의 명장 임경업도 누명을 씌워 죽여버렸다. 남은 것은 조귀인의 권세를 견제하는 일이었다. 세자 책봉 문제를 두고 조귀인의 아들 숭선군과 봉림대군을 두고 저울질하던 김자점은 봉림대군을 선택했다.
봉림대군은 소현세자빈과 조카들, 그리고 임경업 장군의 죽음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김자점과 조귀인의 모략이 횡행하는 와중이어서 와신상담하며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효종(봉림대군)은 강력한 북벌정책을 펼치면서 김자점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 무능한 대응으로 한양을 적의 수중에 넘긴 김자점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던 것이다. 김자점은 이러한 봉림대군의 배신에 분한 마음을 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자점은 서가에 올려둔 나무기러기에 날개가 돋은 것을 보았다. 나무기러기에서 날개가 돋다니. 김자점은 신통해하며 나무기러기를 살펴보았다.

"하늘이 나를 살피시는구나."

날개는 초록 이파리처럼 싱싱하고 또렷했다. 김자점은 아들 김엄을 불러 나무기러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효종을 폐하고 숭선군을 보위에 올리는 반정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런데 숭선군을 보위에 올리려던 김엄의 모반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국정 전반에 걸쳐 전횡을 일삼을 뿐 아니라 사리사욕을 채우고 왕가를 업수이 여기던 김자점을 도모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효종의 치밀하고 오랜 계획에 걸려든 것이었다. 김자점은 몹시 분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중놈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괘씸한 중놈 같으니라고."

김자점은 역적의 수괴로 인정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으며 효명옹주는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김자점이 죽고, 효명옹주의 전장이 철폐되자 내삼리 사람들은 권력을 휘두르던 지장을 멀리 쫓아버렸다. 그리고 장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삼백천지 깊이만큼 못을 팠다. 김자점의 손부 효명옹주의 장사가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삼백천지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 뒤 삼백천지의 이름은 '역적의 못'이 되었다.

김자점은 유자광, 임사홍과 함께 조선의 삼대 간신 중 한 명으로 거론될 만큼 간사한 인물이었다. 김해와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데도 내삼리에 김자점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그의 손부인 효명옹주의 전장이 그곳에 있었고, 그에 대한 백성들의 증오심과 원성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삼리는 지금 공단이 들어서서 질 좋은 쌀의 명성은 다 잃어버렸지만 역적의 못 내삼지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김해뉴스
조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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