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각의 역사를 바꾼 로댕의 '신의 손'.






빗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접어 넣고 로댕미술관. 실내로 들어갔다.
 
역사적으로 미술관은 그 기원이 무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 영원한 삶을 꿈꾸며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장소, 무덤에 생전의 물건을 함께 묻었던 안타까움이 미술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다른 의미로 미술관을 무덤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지나간 과거의 유명 작품들만을 수집하는 일에 열중하는 미술관에 대한 비판의 말이다. 하지만 미술관이 단순히 창고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관은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작가를 찾아내는 일에서부터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 공간으로서의 역할까지 그 영역을 점점 더 넓혀가고 있다. 아무튼. 유럽의 도시와 굳이 비교하자면 김해 정도의 도시라면 이미 크고 작은 미술관이 여럿 있어야 한다. 당연하지만 미술관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모두 정부와 예술가 그리고 시민이 저마다 혹은 함께 힘을 모아 문을 연 것들이다. 1911년 로댕(1840-1917)의 작업실인 오텔 비롱을 구입한 프랑스 정부는 그곳에 국립미술관을 설립하는 조건으로 로댕의 전 작품과 소장품 모두를 로댕으로부터 기증받았다. 프랑스에서 생존 작가를 위한 국립미술관은 1973년 니스에 세워진 샤갈미술관이 처음이다. 로댕이 뇌졸중 없이 조금 더 생존했더라면 40여년이나 앞당겨 그 최초라는 영광을 그가 차지할 뻔했다. 1919년. 아무튼. 로댕이 세상을 떠나고, 2년 만에 그의 거처가 오늘의 불멸의 미술관으로 재탄생됐다.
 
▲ (상) 키스/(하) 꽃장식 모자를 쓴 소녀.
실내. 넓은 홀 안쪽으로 흰 대리석 작품이 보인다. '키스'. 벌거벗은 남녀가 입을 맞추고 있다. 정원의 조각들이 애당초 공공설치물로 설계돼 어쩔 수 없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면 실내에 전시된 작품들은 개인적이며 좀 더 내밀한 로댕의 세계를 보여준다. 입구로 들어선 걸음을 작품들이 전시된 홀의 안쪽으로 옮긴다. 그런데 잠깐. 미술관 가이드북에는 지금 서 있는 이 넓은 홀이 제 5전시실로 나와 있다. 연대기적 순서로 작품을 보려면 입구에서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꺾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저택 시절 식당이었다는 왼쪽의 기념품 상점을 지나 분명 주방이 있었을 작은 방이 바로 출발선이다. 하지만 걸음은 무심코 앞으로 전진한다. 관성이란 무서운 것이다. 대개의 경우 많은 미술관이 중앙 홀을 지나고 나서야 한쪽으로 굽어지며 본격적인 전시실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몸이 기억하는 것일까. 습관처럼, 전시실 표식의 숫자가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일단 순서대로. 기념품이랑 로댕과 미술에 관련된 책도 팔고 하는 상점을 지나 제 1전시실에서 시작. 작은 크기의 유리상자 주변을 관람객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 아주 유명한, 미술책에서 사진으로 이미 눈에 익은, 흙을 구워서 만든 테라코타인 '꽃 장식 모자를 쓴 소녀'다. 걸그룹의 아이돌 스타처럼 어여쁜 소녀 곁에 관객이 많다. 눈길 한 번 제대로 맞추기 힘들다. 그러나 수줍은 소녀의 모습은 소박하고 여전히 사랑스럽다. 1865년 작이니 당시 로댕의 나이 25살. 모델은 로즈. 평생 두고두고 로댕으로부터 어지간히 애를 많이도 먹었던 그의 부인 로즈다. 20대 초반이었을 로댕과 로즈. 어여쁜 소녀상을 보고 있자니 그때는 아마 그도 그녀도 마냥 순박했던 시절이었을 성싶다.
 
작은 방으로 이어지는 제 3전시실. 그의 출세작인 '청동시대'가 있다. '청동시대'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서 직접 본을 떠내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살롱 전 입상은 실패했지만 그의 천재적 솜씨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때로는 사실보다 크게 부풀려져 파리는 물론 유럽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살롱 전 낙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로부터 새로 조성될 장식미술관에 필요한 대작 '지옥의 문'을 주문받았다는 소식은 그의 이름에 신화의 날개를 달았다. 아무튼. 지금은 로댕미술관 관람객과 함께 등신대인 '청동시대'를 보고 있다. 아름답다. 요즘 말로 몸짱이라 부르는 아름다운 남자의 몸이다. 구상적 인체묘사에 있어서는 기원전 그리스시대 대가들의 솜씨가 미켈란젤로로 이어진 이래, 로댕의 '청동시대'에 와서 비로소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평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적어도 사실적으로는 로댕보다 더 잘 만들 수 없다 그런 뜻이다. 로댕은 금세 파리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로댕은 고전 조각과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자였으므로 전통 미술과의 갈등이 일어날 여지도 없었다.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하지만 예술가란 관성과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이다. 로댕도 그저 평범한 조각가가 아니었으니 그 싸움에 예외가 아니었다.
 
▲ 다나이드.
물리학적 용어로 관성이란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현재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이다. 위대한 모든 인물들이 그렇듯 위대한 예술가 또한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청동시대' 이후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후반기 삶은 관성과의 부단한 싸움이었다. 때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이어지는 변혁기. 로댕의 동갑내기 친구인 모네를 비롯한 일군의 화가들은 이미 인상파라는 거대한 물결로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조각 분야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로댕의 차례였다. 로댕은 사회의 모든 관성과 끊임없이 싸웠고 그 싸움은 그의 말년까지 이어졌다.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서양 조각사 물길을 새롭게 바꾸는 작업이었다.
 
일반 저택을 고쳐서 만든 미술관이라 창이 많아서 좋다. 창틀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본다.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미술관의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넓다. 도심의 이 넓은 땅을 돈을 주고 사려면 얼마나 들까. 쓸데없이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본다. 입구 쪽 조각 정원 너머는 군사박물관인 앵발리드다. 겨울인데도 초록의 푸르름이 여전하다. 북위 40도의 파리. 겨울이지만 생각보다 춥지는 않다. 하늘이 안개가 밀려 올 때처럼 다시 뿌옇게 되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 대성당.
신의 손.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입을 맞추려는 남녀가 신의 손 안에서 탄생하고 있다. 재질은 하얀 대리석. 마감을 곱게 해 매끈한 질감과 그리고 대조적으로 거친 채 미완성으로 남겨진 부분이 공존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에서 보았던 의도적 미완성인 논 피니토. 또 하나의 걸작 '신의 손'이다. 2010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로댕 특별전이 열렸을 때 전시회 제목이 '신의 손-로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신의 손'도 함께 전시되었다. 전시회 제목에서 '신의 손'이 있는 전시회란 의미와 로댕이 바로 신의 손이라 뜻이 함께 읽힌다. 잘 뽑았다. 로댕은 여러 점의 '신의 손'을 남겼다. 처음 제작한 것은 1896년 뮌헨 전시를 위한 석고 작품. 그리고 지금 미술관에 있는 작품은 1916년 바로 이 로댕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해 말년에 다시 제작된 것이다. 로댕에게 손은 특별한 의미다. 그는 '신의 손' 이외에도 여러 점의 손을 소재로 한 조각을 남겼다. 로댕의 손을 보고 있으면 창조를 한다는 점에서 조각가의 손과 신의 손이 다르지 않다는 로댕의 배짱이 전해온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덩달아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2층의 전시실을 마저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걸음. 힘들지 않고 가볍다. 조각 정원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발자크'도 '칼레의 시민'도 비를 맞고 있다. 떠나기 아쉽다. 빗줄기가 다시 굵어진다.


Tip. 로댕미술관 구조 ─────────

▲ 로댕미술관 전경.
미술관 실내는 2층으로 되어 있다. 전시실은 아래층에 9개, 위층에 8개 있다. 미술관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순서대로 구경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제 1 전시실부터 연대기 순으로 로댕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제 6전시실은 로댕의 연인이자 제자였던 비극적 인물 까미유 끌로델(1864~1943)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 14전시실에는 로댕이 수집한 인상파 화가들의 회화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로댕은 특히 고흐를 좋아해 '화상 탱기 초상' 등 고흐의 수작이 여러 점 있다.
 
부대시설 : 구내 서점이 1 전시실 바로 앞에 있으며, 미술관 정원 오른쪽에 야외 테라스 카페가 있다. 관람을 끝낸 후 그리고 넓은 정원을 산책하고 돌아와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기에 좋다.






이영식 김해 윤봉한치과 원장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