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의 여명, 한림의 딸기 수확, 임호산에서 본 들판, 눈내린 해반천, 화포천 어리연, 대성동고분의 고목, 신어산의 철쭉…. 이윤기(70) 한국사진작가협회 김해지부장이 찍은 사진들의 제목이다. 김해가 다 보이는 듯하다. 그는 꽃을 찍기 위해 오전 5시부터 몇 시간을 내처 기다린다. 첫 꽃잎이 열린 날부터 마지막 꽃잎이 떨어질 때까지 한 달이 넘도록 가고 또 간다. 그걸 몇 년 동안이나 계속한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 중에서 최고의 사진을 건져낸다. 김해를 담은 사진 수 만 장을 찍어온 이윤기지부장. 그의 사진 인생을 들어봤다.

▲ 이윤기의 사진 속에서 김해는 아름답고 정겹다. 이윤기가 사진 촬영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의 분신같은 카메라를 만져보고 있다. 박나래 skfoqkr@
베트남전 때 통역병 수당과 월급 모아 카메라 구입
제대 후 공무원 생활 거친 뒤 인쇄소 차려
컴퓨터·사진식자기 등 김해 최초 도입

나이 쉰에 접어들어
카메라 다시 손에
김해만 수만장
지난해 전시회 가져


이윤기는 장유면 유하리 하손마을에 살고 있다. 유하리 142번길 13-2의 집은 등기 연도가 1905년이다. 부인의 조부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그는 지은 지 100년이 넘는 집 본채의 내부공간을 손본 뒤 부인과 단 둘이서 살고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과 작은 채마밭이 보인다. 마당 안쪽에 장독대가 있고, 집 뒤에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다. 정겨운 풍경이다.

이윤기는 1947년 7월 일본에서 태어났다. 다섯 남매 중 딱 가운데 아들이었다. 누나, 형, 남동생, 여동생이 다 있다는 말에 부럽다고 했더니, "어릴 때는 옷도 신발도 모두 형 것을 물려받았다"며 웃었다.

광복이 되자 그의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경남 사천으로 갔다. 6·25 전쟁이 터지자 김해 가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다섯 살 때 겪은 전쟁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비행기 폭격도, 다섯 살 본인이 어린 동생을 업고 한없이 길을 걸어가던 일도 생각난다고 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사천에서 걸음마를 뗐지만, 고향은 김해이다. 나도 사람들도 '이윤기의 고향은 김해'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윤기는 어릴 때부터 사진을 좋아했다. "사진도 좋고, 찍어보고도 싶었죠. 하지만 당시에는 카메라를 가진다는 건 상상하기도 힘들었지요. 제 카메라를 처음 장만한 건 베트남에서였습니다." 그는 군에 입대하자마자 일등병 계급장을 달고 맹호부대 대원으로 베트남에 파병됐고, 2년 8개월 동안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맹호부대에서 실시하는 베트남어 교육을 받고 베트남의 반칸군청에서 2년여 동안 통역병으로 근무를 했지요. 통역수당을 따로 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어요. 시간도 조금 여유가 있었구요. 그래서 사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통역수당과 월급을 모아 일제 캐논카메라 두 대를 샀다. 1968년 당시의 돈으로 800달러를 줬다. "지금 우리 돈으로는 얼마쯤이 될지 모르겠네요. 제 카메라가 생겨서 좋았지만, 필름이 워낙 비싸서 마음껏 사진을 찍어보지는 못했어요. 찍고 싶은 걸 잘 찍으려고 온갖 정성을 다 해서 셔터를 한 번 눌렀지요."

이윤기는 베트남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찡해진다고 말했다. "예술적인 작품사진으로는 조금 모자랄지 모르지만…. 그 사진을 찍을 때의 마음, 풍경들은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사진들을 수록할 생각입니다."

그는 베트남에서 첫 휴가이자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휴가를 갈 우리나라 군인들이 공항에 모여 있는데 폭격이 시작되더라구요. 휴가를 못 가겠구나 싶었는데, 다행히 비행기를 탈 수 있어서 휴가를 나왔죠.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다함께 현충원에 가서 참배를 하고 서울역으로 갔죠. 기차표가 없더군요. 마침 설이었거든요. 그래서 화물선에 끼어서 12시간을 내려와 겨우 김해로 왔지요."

제대 후에는 공무원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부산 동구 수정3동사무소에서 5년 8개월 간 근무하고 돌아오면서 '수정(水晶)'이라는 이름을 간직했다. "글도 좋고 이름도 좋아서 김해에서 그 이름으로 인쇄소를 차렸지요." 그는 부원동에서 '수정인쇄사'를 28년간 경영했다. 컴퓨터, 사진식자기 등을 김해 최초로 도입했던 수정인쇄사는 관공서의 업무 보고서에서부터 반상회보까지 인쇄하느라 바빴다.

이윤기가 사진을 다시 찍기 시작한 것은 쉰이 되어서다. "1994년 인제대학교 평생교육원 사진반에서 최민식 선생에게서 사진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했지요. 전세버스를 타고 사진촬영도 다녔지요." 그 때 함께 사진을 찍던 동기가 50여 명인데, 지금까지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동기는 10여 명이라고 한다.

"2002년 제게 큰 아픔이 닥쳐왔어요. 대학졸업을 한 큰 아들을, 다 키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말았습니다. 문소리만 나도 아들이 오나 싶었지요. 마음이 얼마나 아팠던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어요.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지만, 제가 신경을 안 쓰니 사업도 잘 안 되고…. 그래서 마음을 달래려고 사진에 열중했습니다. 2002~2006년 중국에 촬영하러 많이 갔어요. 외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도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그렇게 10년이 지나는 동안 아픔이 조금씩 풀렸어요. 마음이 가라앉았던 거지요. 사람들은 그때 저더러 '사진에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때 저는 아픔을 달래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겁니다."

카메라로 세상을 바라보고 셔터를 누르는 동안에는 아픔도, 그로 인한 무수한 생각들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찍었던 사진들은 그에게 경남사진대전과 대한민국사진대전 수상 소식을 연이어 안겨주었다.

이윤기가 찍은 사진의 분량은 얼마나 될까. "중국에서 찍은 사진 필름만 라면 상자로 2개 분량이었어요. 중요한 것만 남기고 버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깝네요. 필름 36판짜리 2천 롤을 찍어봐야 사진을 조금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많이 찍어보라는 말이겠죠.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었는지 정확히 어떻게 알겠어요."

그는 신어산 단풍을 찍으러 갔다가 크게 다치기도 했다. "사진을 찍고 내려오다가 비에 젖은 길에 미끄러져 다쳤어요. 1년 반이나 직접 마사지를 한 다음에야 겨우 멍이 풀렸어요." 2009년에는 화왕산 억새태우기 행사에 회원들과 함께 촬영을 갔다가 여자 회원 한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화상을 입어 큰 물집이 생긴 줄도 모르고 화원들을 찾아 정신없이 다녔다고 한다. 그의 사진마다 사연이 없는 게 없을 것 같았다.

2014년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열린 '아티스트 인 김해' 전에서는 '이윤기-김해의 사계전'이 열렸다. 그가 12년간 찍어 온 김해의 사진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였다. 연지공원, 신어산, 무척산, 김해 들판, 봉하마을, 해반천, 김해 시가지, 수로왕릉,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대성동고분박물관…. 김해의 곳곳이, 그리고 사계절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전시가 끝난 뒤에 그는 사진들을 김해시에 기증했다. 그는 수정인쇄사에 이어 수정사진갤러리를 8년간 운영하며 후진 작가들을 양성했는데, 8년 만에 갤러리 문을 닫을 때 김해를 찍은 사진과 시설 일체를 김해시에 기증하기도 했다.

이윤기의 사진 속에서 김해는 아름답고 정겹다. 김해가 얼마나 근사한 고장인지를 자랑할 때 그의 사진 한 장은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이다. 그는 김해 들판을 찍기 위해 임호산에 올라가 봄과 여름 장면을 따로 찍었다. 들판의 벼가 익어갈 때는 황금들녘 벼 이삭을 렌즈에 가득 담았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 찍었지요. 그런데 계속 찍다보니 어느 시기와 시간에, 어떤 날씨에 가면 좋은 장면을 담을 수 있는지를 알겠더군요." 사진을 찍기 위한 최적의 여건이 그의 머릿속에 자동으로 입력됐다는 말이다. 그는 연지공원의 벚꽃, 신어산의 철쭉과 단풍을 찍기 위해 같은 장소를 몇 번이고 몇 년이고 찾아갔다. 그가 찍은 김해의 사진들은 그렇게 해서 만든 작품들이다. 이윤기의 사진을 보면 그가 김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 마음이 보인다. 그는 말한다. "날씨만 봐도 지금 김해의 어느 곳이 가장 아름다울지 알아요." 

≫ 이윤기
한국사진작가협회 김해지부장, 김해사진연구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한국사진작가협회 광고스톡분과위원. 김해인제사진동우회 초대회장 역임, 한국사진작가협회 상업저작분과위원 역임. 대한민국 사진대전 입선 2회(2006, 2007), 경남사진대전 입선 8회. 제4회 경남사진문화상 수상(2008). 해외사진촬영 20회(태국, 베트남, 중국, 일본, 타이완, 백두산), 제1회 개인전 개최 및 이윤기사진작품집 발간(2008). 2014 '아티스트 인 김해'전.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