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해반천은 감분과 곡내, 큰구분등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삼계동에서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 해반천이 시작되는 지점에 어느 때부터 장대가 있었다. 장대는 장형(큰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을 집행할 때 죄인을 엎어놓는 틀을 말하지만 사형이 집행되던 장소를 일컫기도 한다. 지금도 전국 여러 곳에 장대골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흉년이나 역병, 전쟁 등으로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된 귀신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여제단과 함께 죽음과 연관되는 장대는 보통 관아의 북쪽에 있었다.
 
고려시대 일이다. 봄이 되면 매화 향기가 가득한 매정마을에서 분산으로 오르는 골짜기 물만골. 숯을 굽고 나무를 하는 가난한 부부에게 아기가 태어났다. 오래 기다린 아이를 얻자 부부는 몹시 기뻤다. 그러나 여느 집들처럼 이름을 짓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갖가지 질병과 재난의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던 때였다. 그때는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 발바닥에 흙이 묻으면(아기가 제 발로 걸을 수 있게 되면) 비로소 이름을 지었다. 생명력이 강한 산천초목이나 나쁜 귀신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천한 것에 빗대어 부르다가 열 살을 넘겨야 비로소 온전한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 가난한 부부도 아이를 숯뎅이라 불렀다. 그러다가 아이가 첫돌을 무사히 넘기자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중 거지꼴을 한 중이 숯가마로 찾아왔다. 중은 숯가마 주변에서 검정투성이가 되어 놀고 있는 숯뎅이를 보더니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착한 심성을 지닌 아이구려. 전생의 업까지 다 갚아줄 아들을 얻었으니 참으로 부럽소이다. 이 아이 이름은 없을 무(無)에 얻을 득(得), 무득이가 어떻소?"
 
부부는 기뻐하며 숯뎅이를 무득이라 부르기로 했다. 중은 무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득아. 내 저어기 여제단 옆에 살고 있으니 가끔 놀러 오너라."

무득은 영특하고 건강하게 자랐다. 어느 날 나뭇짐 지게를 진 아버지를 따라 장에 가다가 요란하게 꽹과리를 치는 사람이 앞장서고, 그 뒤로 군졸들이 창을 들고 마바리(말이 끄는 수레)를 호위하며 가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어린 무득은 신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꽹과리 소리에 흥을 내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에게도 말과 수레가 있다면 좋겠어요. 나무도 숯도 많이 실어 나를 수 있을 것이고요, 장에까지 먼 길을 다리 아프게 걷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또 저렇게 꽹과리를 치며 길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신나지 않겠어요?"

▲ 그림 = 박점숙 화가
고려시대 물만골 숯 굽는 부부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아들 태어나
지나던 중이 이름 지어주며 "착한 아이"

역병으로 어머니 잃고 슬퍼하던 무득
그리움 삭이려 여제단으로 가던 중
야릇한 향기의 여인과 마주치는데 …
 
 

아버지는 놀라서 얼른 무득을 돌려세웠다. 무득이 본 것은 사형수가 싸릿대로 만든 용수갓을 쓰고 마바리에 실려 사형장이 있는 장대로 가는 장면이었다.
 
"저 사람은 죄를 많이 지었단다. 나라에는 지켜야 할 법이라는 게 있어서 죄를 지으면 목을 잘라 죽여 버린단다. 마바리를 탄다고 다 좋은 건 아니란 말이다."
 
무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죄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목을 잘라 죽이나요?"

"크게는 나라를 나쁘게 하고 작게는 다른 사람을 나쁘게 하는 것이 죄란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하는 게 죄라는 건 알겠어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일,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 같은 건 하면 안 되지요. 하지만 나라를 나쁘게 하는 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나라의 일은 네가 알 것 없다. 그건 벼슬을 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니까."

아버지의 엄중한 말에 무득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대스님은 벼슬을 하지 않는데도 나라의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씀이 많으시던데요?"

무득의 말에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대스님은 무득의 이름을 지어준 바로 그 중이었다. 장대스님은 여제단 근처 토굴에 살았는데 사철 이가 들끓는 누더기 한 벌을 걸치고 다녔다. 관가에서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나 사형수, 제사를 지내줄 자손이 없는 무주고혼의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를 봄가을로 지내고 있었지만, 더러 연고가 있어 제사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장대스님은 탁발도 하지 않고 여제단 제물을 주워 먹고 살았다. 나라에서도 장려하는 불법(佛法)이 융성하던 때라 산골짜기마다 절이 있었고, 중은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도 장대스님은 오막살이 절은커녕 토굴에서 짐승처럼 살면서 가진 것이라곤 불구(佛具)인 목탁과 바라 외에 닳고 닳은 나무수저 한 벌과 바가지 몇 개밖에 없었다. 무득의 아버지가 가끔 버선이며 짚신, 새 옷을 장만해주어도 언제 누구에게 줘버렸는지 곧 보이지 않았다.

장대스님이 언제부터 거기 살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오래 전부터라고 했다. 그런데 장대스님이 오고부터 사형 집행이 있는 날이면 밤새도록 장대에서 목탁과 바라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장대스님이 사형수의 원혼을 위로하고 시신을 불에 태우는데, 이른 아침 장대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본 사람도 있었다. 사형수의 시신은 관가의 허락 없이는 설령 가족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거둘 수 없게 되어 있어서, 장대스님이 오기 전에는 장대에 참혹한 시신이 널려 있기 마련이었다. 하여 사람들은 법을 어기고 사형수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대스님을 관아에 고하지 않았다. 장대스님이 사형수의 시신을 수습하고부터 장대는 훨씬 덜 무서운 곳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대스님이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었다. 나라 법을 크게 어긴 죄인은 죽어 마땅하고, 그런 죄인의 시신은 거둬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절을 지어 중 옷을 입고 앉아 있기만 해도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 것인데, 여제단 제물이나 주워 먹고 거지꼴로 살면서 죄인의 시신이나 수습해주고 다니는 장대스님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아이들을 훈계하기도 했다.
 
무득의 아버지는 장대스님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몰골이야 어떻든, 장대스님이 하는 일이 옳든 그르든, 장대스님은 무득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어서 글을 가르치고 싶어도 뜻을 이룰 수 없던 차에 장대스님이 공짜로 책도 주고, 글도 가르쳐주니 여간 고맙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득이 글을 배워 고을의 관아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버지의 어진 심성을 물려받은 무득은 분명히 좋은 관리가 될 것이라 여겼다.
 
"무득아. 그런데 마바리에 탄 사람이 왜 용수갓을 쓰고 있는지 아느냐?"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저건 술을 거를 때나 냇가에서 물고기 잡을 때 쓰는 물건이잖아요."

"죄는 돌림병과 같은 것이란다. 이 사람한테서 저 사람한테로 옮아가는 돌림병 말이다. 죄를 지어 죽게 된 사람의 얼굴을 보면 다른 사람에게도 죄가 옮는 것이지. 그래서 죄 짓는 사람이 늘어날까봐 저렇게 얼굴을 가리는 것이란다. 너는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

무득이 열세 살이 되던 해 가을, 고을에 돌림병이 돌았다. 병에 걸린 사람은 열이 몹시 나고 설사를 하고 헛소리를 하다 죽었다. 한겨울이 되었지만 병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은 땅에 묻지 못했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장되어 여제단 귀신이 되었다.

"여제단 근처에는 얼씬도 말거라. 거긴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이 우글우글하니 병이 옮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무득에게 신신당부했다. 사이좋게 지내던 마을사람이 여러 명 죽었고, 무득의 동무도 셋이나 죽어 여제단의 귀신이 되었다. 무득은 사방에 널린 죽음의 한가운데서 무서움에 떨었다. 죽음에 대한 무서움을 견디다 못해 하루는 장대스님을 찾아갔다. 장대스님은 양지바른 곳에 옷을 벗고 앉아 이를 잡고 있었다.
"스님. 제 죽은 동무들도 저기 있을까요?"

장대스님은 무득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동무들 죽은 것이 가여우냐? 죽은 동무들은 살아 있는 너를 가여워할지도 모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 있는 게 낫다고 어른들이 그랬어요. 그런데 죽은 동무들이 왜 저를 가엾게 여길까요?."

"살아 있는 게 죽기보다 힘들 때도 있는 법이니라."

무득은 장대스님 옆에서 이를 잡아주다가 집에 갔다. 그런데 마당에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어머니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돌림병 귀신이 기어코 여기까지 왔구나."

무득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간호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런데 돌림병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약초 한 뿌리 구할 수 없었다. 이레 만에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무득은 슬픔을 이길 수 없어 장대스님을 찾아갔다.

"인연이 거기까지인 것을 어찌하겠느냐. 슬픔을 거두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거라."

돌림병은 봄이 온 뒤에야 숙지막해졌다. 무득은 아버지를 도와 나무를 하고 숯을 구웠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여제단에 가서 합장하고 절을 올린 뒤, 장대스님을 찾아가 괴로움을 호소했다.

"모든 인연은 고통이니라. 사랑하면 사랑해서 괴롭고 미워하면 미워해서 괴롭지."

"저는 아직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죄라는 건 돌림병처럼 옮겨다닌다고 하셨는데, 미워하는 마음도 죄와 같아서 여기저기 옮겨다닐 것입니다. 저는 절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계곡의 물처럼 맑고 착한 네 마음에 슬픔이 고였으니 얼마나 괴롭겠느냐. 불경을 읽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슬픔을 견디거라."

무득은 마음을 다해 염불을 하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삭였다. 숯을 굽고 나뭇짐을 지고 장에 가면서도 염불을 하니, 열여섯 살이 된 무득은 헌걸찬 몸에 고요한 눈빛을 가진 청년이 되었다.
 
어느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여제단에 가던 무득은 술병과 돗자리를 들고 내려오는 여인과 마주쳤다. 여인은 소복을 입고 있었는데, 여제단에 제사를 지내고 오는 길인 듯했다. 무득은 공손히 길을 비켜주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꼭 저 여인만큼 나이를 드셨겠지."

그런데 눈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여인에게서 야릇한 향기가 났다. 이제까지 맡아본 적이 없는 야릇한 향기에 무득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김해뉴스
조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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