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나무를 다루어 온 건 헤일 수 없이 오래 됐지요. 인류가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전해지는 동안 수천, 수만 명의 장인들에게 기술이 전수됐을 겁니다. 지금의 저는 특정한 누구 한 사람의 선생에게서 그것을 배운 것이 아니죠. 선대의 수천 장인의 경험이 축적돼 전해져 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렇게 배운 것이 더 완벽해지도록 저 역시 많은 경험을 하고, 다지고,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번호 '공간'에 초대한 소목장 송유훈(46) 씨의 말이다.

▲ 송유훈이 문갑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대패질을 하고 있다. 박나래 skfoqkr@

송유훈의 작업장은 삼계동 감분마을에 있다. 감분마을 회관 앞에서는 정비소 등 공장이 보였다. 하지만, 마을 안쪽으로 올라가니 차 한 대가 다닐만한 골목길 옆의 집들과 마을의 역사를 지켜보았던 나무들이 보였다. '감분'이라는 자연마을의 이름도 여전히 남아있는 곳이었다.

마을길 끝에 집이 한 채 있었다. 그의 본가였던 이 집에는 현재 동생이 살고 있었다. 이 집의 한쪽에 그가 만든 가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집 맞은편에 80여 평 규모의 송유훈의 작업장이 있다.

층고가 높은 작업장에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나무가 끝도 없이 보였다. 톱밥이 고운 먼지처럼 내려앉은 작업대들 사이로 마무리작업 중인 목가구도 놓여있었다. 안쪽의 작은 방에는 작업공구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돌대송곳, 탕개톱, 활비비, 탈피날, 그므개 등 전통공구도 보였다. 모두 쓰기 편하도록 송유훈의 손에 맞게 그가 직접 만든 공구들이다.

송유훈은 감분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삼계초등학교, 김해중, 김해고를 졸업한 김해토박이이다. "예술가, 장인들 중에 아마 어렸을 때 손재주가 없었던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어렸을 때 저는 물론이고 친구들은 자기가 가지고 놀 놀잇감을 직접 만들었지요." 특별할 것 없었다는 그에게 그래도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같은 걸 만들어도 조금 다르긴 했지요. 썰매를 만들 때 브레이크를 만들어 붙이거나, 발이 좀 더 편하게 놓일 수 있도록 했죠. 가오리연에 꼬리를 세 개쯤 더 붙이고, 새총을 만들 때 고무줄을 두세 개 덧달고. 똑 같이 만들지 않고 궁리해서 제 생각대로 만들었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릴 적의 손재주를 끝까지 붙잡고 가느냐, 아니야 하는 거죠. 재미있는 것, 좋아하는 것, 그리고 최고의 수준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 거니까요. 작가가 된다는 건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구요."

그는 '99%의 노력과 1%의 재능'이라는 말을 했다. "1%의 재능을, 그 본질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타고 난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훈련과 숙련과정을 거쳐서 완벽해져야 합니다. 기술만 보여주려고 하면 본질이 안 보입니다."

소목장은 나무의 특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의 작업장에는 제재소에서 2년 여 숙성과정과 3년여 건조 과정까지 거친 나무들이 있었다. 언제든 바로 쓸 수 있는 나무들이었다. "나쁜 재료는 없어요. 쓰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지요. 나무는 한번 잘못 자르면 끝입니다. 나무가 가진 특성을 잘 이해해야, 이 나무로 무엇을 만들지 디자인이 떠오르고 그래야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드는 사람의 정신세계가 더 중요합니다."

그는 작업을 하기 위해 나무를 골랐는데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없을 때는, 아직 그 나무로 작업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에게도 어떤 일을 할 시기가 있는 것처럼,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만들면 좋을지 디자인이 안 떠오르면 제자리에 갖다 놓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나무를 보았을 때 '이거다!'하고 떠오르는 순간이 있어요. 그때 만드는 겁니다." 장인과 나무도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 작업장 안쪽 방에는 작업공구들이 가득 걸려 있다. 손에 맞게 그가 직접 만들었다. 위 사진은 한창 제작 중인 목가구.
나쁜 재료란 애시당초에 없다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을 뿐

나무와 장인도 인연이 있다
이거다! 싶을 때 그저 만들면 그뿐

1%의 재능에 99%의 노력 얹어
창의적 작품세계를 끄집어내면 될 뿐

물론 그게 무척이나 어렵지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필요할 뿐

"어떤 나무가 자꾸 눈에 씌는 거죠. 많은 나무들 중에서 유독 나를 부르는 나무가 있고, 그 나무를 보면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할지 마음에 와 닿는 거죠. 귀한 인연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좋은 나무를 서툰 목수가 망쳐서야 되나요. 좀 더 기술을 축적한 뒤에 그 나무를 만나야 하는 거죠."

그는 "내가 나무를 구하러 다녀야 나무가 내게로 오더라"고 말했다. "부지런히 나무를 보러 다녀야 해요. 그렇게 다니다 보면 누군가가 필요 없다고 버린 잡목이 내게는 꼭 필요할 수도 있고, 그렇게 나무를 구하러 다니는 나를 기억했던 사람들이 좋은 나무가 나왔다고 연락도 해줍니다."

그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고,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제품디자인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공예를 부전공했지요. 가구를 만들고 싶어서 서울에서 디자인연구소를 다니던 2000년께 소목장 박명배 장인을 찾아갔습니다. 혼자서는 풀리지 않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거든요. 함께 배우는 제자들이 동호회를 만들어 전시회도 했습니다. 박사과정 공부하고, 대학에 출강하고, 그러다가 박명배 장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부터는 이수자 교육을 받았습니다. 3년의 이수자교육 과정이 얼마 전 끝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사람의 선생에게 배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문명이 태동한 이래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나무를 다루는 기술에는 얼마나 많은 장인들의 기술이 축적돼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수천, 수만의 장인들이 축적해온 것을 배운 겁니다."

그는 실수의 경험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수의 경험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도 장인에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학생 때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혼자 가구를 만들 때 실수를 많이 했지요. 그 실수의 경험 뒤에 박명배 장인을 만났을 때, 말 한마디만 들어도 문제가 해결되더라구요." 그를 찾아와 배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의 마음은 어떨까. 그는 "백 개는 만들어 봐야 제자를 가르칠 수 있겠더라, 몇 개를 만들어보고는 가르칠 수가 없더라"고 말했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나무의 결, 나이테 등 나무의 속살에 새겨진 자연적인 무늬를 그대로 이용한다. 서랍장은 옆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서랍이, 문갑은 각 문짝이 수묵 풍경화처럼 이어져 한 폭의 그림 같다. 혹시 그려 넣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시골에서 자란 것이 저에게는 큰 자양분입니다.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자라는 동안 자연계의 정보를 많이 습득했나 봐요. 그래서인지 자유로운 아이디어가 많은 편이지요."

그는 세계적인 미술가 문신(1923~1995)이 남긴 말 '노예처럼 작업하고 신처럼 창조하라'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신처럼 창조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실수와, 경험과, 기술의 축적이 필요할까요. 그 모든 것을 제  안에 다지고, 쌓아가는 겁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겁니다. 치열하게 자기 작품을 만드는 사람. 자신이 생각한 느낌을 끄집어내 작품으로 보여주는 사람. 창의적 의지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작가입니다."  

≫ 송유훈
중앙대학교 석사, 박사 수료(제품디자인). 한국산업인력공단 국가기술자격검증 위원, 디자인부문 전문위원, 훈련교재편찬위원. 기능경기대회 운영위원. 고용노동부 디자인 전문위원.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심의위원. 중소기업청 자문위원. 한국산업단지공단 심의위원. 인제대학교 디자인대학 제품디자인학과 겸임교수. 네오디자인(주) 이사. 한국미술협회 현대공예 초대작가, 전통공예분과 이사. (사)한국공예가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재수리기능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보유자 박명배)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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