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라자키 노리코(49) 씨의 첫인상은 인상적이었다. 깊은 눈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얼굴. 그 속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집엔 대식구가 모여 산다. 여든이 넘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아이는 다섯이나 된다. 그는 "어찌나 바쁜지 하루가 모자랄 정도"라고 했다.
 
노리코 씨가 한국에 시집온 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1993년. 통일교 재단의 소개로 남편 김호경(49) 씨를 만났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그때는 지금처럼 다문화 가정을 위한 교육도 없었다. 그가 손에 쥔 건 간단한 한국어가 적힌 프린트 한 장. 손짓을 섞어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깊은 대화를 할 수 없다 보니 오해도 생겼다. "자꾸 물어보면 싫어하더라고요. 묻고 싶은 얘기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아는 단어가 별로 없다 보니…."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내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괜찮다"며 활짝 웃어보였다.
 
그는 어느새 '다둥이 엄마'가 됐다. 아이를 다섯이나 낳고 키우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큰 딸 묘선(18)이와 막내아들 완태(7)는 무려 11살이나 차이가 난다. 마냥 행복할 것 같은 그도 둘째 완재(15)와 완탁(14)이를 키울 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연년생인 탓에 손가는 일이 많았다. 몇 년 후, 넷째인 찬형(10)이도 태어났다. "남자 아이들이라 어릴 땐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한 건 시부모님과의 교육방식 차이였다. 그는 평소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타이르 듯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따끔하게 야단쳤다. 속상했다. 아이들이 행여 반항심이 들지 않을까 걱정이 많이 됐다. 그래서 자구책을 마련했다. 아이들과 함께 매일 명상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무조건 혼내기보다 아이들도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도 시부모님을 향한 정성만큼은 지극하다. 그는 시아버지가 회사에 다닐 땐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시부모님께 더 많이 못해드릴 때는 항상 마음이 아파요." 이 때문에 그는 지난해에는 '김해를 빛낸 인물 1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항상 저를 이해해주시는 시부모님께 감사하죠. 그리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리코 씨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남편 김 씨도 '김해시장상'을 받은 적 있다. 시에서 환경감시단으로 활동하는 김 씨의 부지런함 덕분이었다.
 
노리코씨의 꿈은 뭘까?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가고 싶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은 바람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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