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짐을 지고 장에 갔지만 여인의 향기와 이상한 기분이 영 사라지지 않았다. 여인을 만난 때문인지 그날은 더 간절히 어머니 생각이 났다. 무득은 어머니도 저세상에서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향기를 내며 편안히 지내도록 더 지극히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다 팔고 돌아오니 아버지와 무람하게 지내는 사람이 와 있었다. 그는 무득이 일을 잘 하니 기특하다고 칭찬을 하고는 안색을 엄숙히 바꾸고 말했다.

"하늘이 남자 여자를 낸 것은 함께 살아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네 나이 열여섯이니 그런 이치는 잘 알고 있겠지?"

무득은 자기더러 장가를 들라는 말인 줄 알고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살 것입니다. 장가들 생각은 아직 해 보지 않았습니다."

마을사람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구나."

무득은 영문을 몰라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을사람이 혀를 차며 덧붙였다.

"네 어머니 가신 지 벌써 삼 년이다. 새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네가 장가를 드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내일 새어머니가 오실 것이니 그리 알아라."

새어머니라는 말에 무득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사람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달았다. 자신에게 어머니는 하나뿐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또다른 아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득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들이 시샘할 만큼 금슬이 좋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여제단 쪽을 쳐다보며 함께 눈물짓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째서 새어머니를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아버지가 섭섭하고 원망스러웠지만 효성이 지극한 무득은 조용히 아버지 앞을 물러나왔다. 조촐한 저녁상을 차려 아버지께 올리면서 무득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새어머니께서 오시면 어머니처럼 모시겠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거짓말을 한 무득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제단의 고혼이 된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무득은 밤길을 걸어 장대스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새어머니를 모시게 되었고, 아버지께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장대스님은 물끄러미 무득을 바라보았다.

"쌓이고 쌓인 인연이 서로 맺고 풀어야 할 것이 있어서 부모와 자식이 되듯이, 새어머니 또한 너의 인연이니라."

"지금 저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없던 마음이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니 새어머니를 미워하게 될 게 뻔합니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과 싸워 이기는 것이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이니라."
무득은 울면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장대스님이 조용히 말했다.

"무득아. 나는 개경에서 나고 자란 왕가의 후손이었다. 다섯 살에 부모님의 사지가 찢기는 것을 보았느니라. 원한과 분노와 복수심으로 몸과 마음을 피로 물들인 채 서른을 넘겼다. 어느 날 칼에 맞아 죽을 고비에 처한 나를 스승님이 살리시고 불법을 알려 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저 장대에서 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나는 장대에서 죽은 사형수의 시신을 거두어주고 있지만, 그동안 내가 지은 악업은 몇 번의 생을 살아야 갚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구나. 너는 어진 부모를 만나 악업이 많지 않으니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무념무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니라."

여제단에서 마주친 야릇한 향기의 여인
비단 옷에 화려한 치장을 한 채 집으로 와
어머니의 빈 자리 대신하며 안방 차지
매일같이 쌀밥에 고기반찬 마련하라 요구

장대스님의 말을 들은 무득은 마음을 다져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무득은 일찍 일어나 집안을 말끔히 치우고 아껴둔 보리를 꺼내 정성껏 찧었다. 그리고 얼굴과 옷을 단정히 하고 새어머니를 기다렸다. 점심나절이 되자 새어머니가 도착했다. 그런데 새어머니를 본 무득은 깜짝 놀랐다. 야릇한 향기를 풍기며 여제단으로 올라가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소복 대신 비단 옷에 요란한 치장을 한 여인은 무득에게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바로 무득이로구나. 일을 잘 하고 효성스럽다는 소문을 들었다. 너 같은 아들을 두게 되어 몹시 기쁘구나. 호호."

새어머니의 말은 무득에게 소름이 쫙 끼치게 했다. 다정함을 가장한 웃음소리는 송곳처럼 날카로웠고, 야릇한 향기는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러나 기뻐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는 내색을 하지 못했다.

"먼 길을 왔더니 몹시 시장하구나. 어서 밥상을 차리거라."

그래 놓고 새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무득은 얼른 부엌으로 갔다. 밥을 짓고 찬을 만들어 상을 보고 있으려니 새어머니가 긴 치맛자락을 끌며 나타났다. 새어머니는 보리밥과 된장국, 푸성귀로 차린 밥상을 보더니 볼멘소리를 냈다.

"나더러 이런 것을 먹으란 것이냐? 첫날 대접이 이 정도이니 내일이면 개밥을 주겠구나."
새어머니는 애써 차린 밥상을 엎어버렸다. 무득은 놀라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낡은 무명옷을 입고 갈퀴처럼 거칠어진 손으로 보리를 찧어 밥을 지어주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러나 무득은 꾹 참고 공손히 말했다.

"다시 지어 올릴 것이니 기다려주십시오."

무득은 쌀과 고기를 사 와서 다시 상을 차렸다.

"이제 조금 먹을 만하구나. 매일 이렇게 차려다오."

새어머니는 무득에게 같이 먹자는 말도 없이 쌀밥과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무득은 부엌에서 보리밥으로 혼자 배를 채웠다.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새어머니가 미운 것은 둘째 치고 매일 쌀밥과 고기반찬을 마련할 일이 다만 아득했다.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는 집은 근동에 몇몇 부잣집밖에 없었다. 지난해가 풍년이라서 보리밥이나마 먹고 있지만 흉년이라도 들라치면 조밥에 피밥에, 시래기죽, 송깃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때도 있었다.

"새어머니를 잘못 모신 듯 합니다"
무득의 원망에 장대 스님 "따라오느라"
산속 커다란 바위에 불상 새기게 해
참회한 새어머니 용서하고 머리 깎아


무득은 장대스님을 찾아가 분통을 터뜨렸다.

"새어머니께서는 저희 형편을 살피지 못하십니다. 아무래도 잘못 모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대스님은 오히려 엄한 얼굴로 나무랐다. "어머니가 깡보리밥만 먹고 남루한 옷만 입고 살다 죽어서 네 마음이 늘 아프다고 하지 않았느냐. 새어머니에게 쌀밥과 고기반찬을 해주는 것이 죽은 어머니에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 아니냐?"

장대스님의 말에 무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스님. 그처럼 간단한 이치를 미처 몰랐습니다."

무득은 비로소 깨닫고 산으로 올라갔다. 쌀밥에 고기반찬을 매일 마련하자면 몇 배나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무득은 나무를 베어 숯가마에 넣고 불을 지폈다. 활활 타오르는 숯가마의 불처럼 새어머니에 대한 미움을 태워버렸다.
그날부터 무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밤이면 나무를 하고 숯을 구웠고, 낮이 되면 장에 나가 그것을 팔아 쌀과 고기를 샀다. 밥을 짓는 것도 빨래를 하는 것도 모두 무득의 몫이었다. 새어머니는 몸을 치장하고 차려주는 밥을 먹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부잣집에서 나고 자라 집안일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단다. 네가 일을 잘 하니 다행이구나."
새어머니의 요구는 끝이 없었다. 옷을 사 주면 신발을 원했고, 이불을 사 주면 가구를 들이자고 했다. 밤낮으로 나무를 하고 숯을 구웠지만 새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새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게을러터진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무득은 이를 악물고 참았지만 서럽고 분한 마음이 자꾸 쌓였다. 무득의 나이가 스물이 되자 짝을 찾아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말도 새어머니는 모질게 잘라버렸다.

"장가를 들면 제 식솔을 먼저 생각하고 늙은 부모를 가벼이 여길 게 뻔합니다."

몇 해가 지나자 무득은 지칠대로 지쳐 버렸다. 고달픈 몸으로 아무리 불경을 외우고 마음을 다잡아도 새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새어머니가 온 뒤로 나무를 하는 일이며 숯을 굽는 일에 손끝도 대지 않고 새옷에 맛있는 음식만 찾으며 빈둥거리는 아버지도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득은 참다 못해 장대스님을 찾아가 호소했다.

"스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집을 떠나버리거나 죽어 버리고 싶습니다."

"머리를 깎고 집을 떠난다고 해서 그 인연이 끊어지겠느냐. 그 정과 망치를 들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장대스님은 물만골 깊숙이 무득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 위에 우뚝 서 있는 또다른 바위 앞에서 멈췄다.

"이 바위를 보아라. 수천년 수만년 이 자리에 있으면서 너를 기다린 것 같지 않으냐? 이 바위와 더불어 마음을 다잡도록 하거라."

▲ 그림=박점숙 화가
그날부터 무득은 바위를 다듬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일하는 틈틈이 울퉁불퉁한 바위를 다듬어 평평하게 고르는 일에 수없이 많은 날이 흘러갔다. 그러던 중에 장대스님이 입적을 했다. 무득은 장대스님을 화장해 여제단에 모시고, 그동안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담아 다시 바위 앞에 섰다. 그리고 무득은 자신이 바위에 새길 부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모진 악업을 이겨내고 엄숙해진 장대스님의 모습과 한없이 자애롭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무득은 정과 망치를 들고 자신의 마음 속에 또렷이 떠오른 부처를 새기기 시작했다.
무득이 밤낮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불상을 새기고 있다는 소문이 났다. 소문은 새어머니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럴 짬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일을 더 할 것이지. 웬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담."

새어머니는 분기에 차서 물만골로 올라갔다. 골짜기 깊은 곳에서 무득이 바위를 쪼고 있는 모습을 본 새어머니는 도끼눈을 하고 다가갔다. 그런데 한바탕 욕을 퍼부어주려던 새어머니는 다리 힘이 점점 빠졌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무득이 정으로 바위에 선을 파서 새긴 부처는 엄숙하고 장엄했으나, 한편으로는 한량없이 온화했다. 그 모습을 본 새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광배를 완성하고 정을 놓으려던 무득은 여인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새어머니가 엎드린 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어머니. 어찌 이러십니까? 제가 또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새어머니가 통곡하며 무득의 손을 잡았다.

"미안하다, 무득아. 나를 용서해주렴."

무득의 한결같은 마음에 감복한 새어머니는 그날부터 딴사람이 되었다.

"어머니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니 이제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돌아가신 어머니와 장대스님을 위해 염불을 하며 살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무득은 그길로 머리를 깎고 장대스님이 살던 토굴에서 살며 장대스님이 하던 일을 이었다.

 

김해뉴스

조명숙작가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