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건국 공훈 명문가 광주 안 씨 종파
진영 의전에 살며 가세 기울어 종살이
민중 "머슴 살아도 근본 지키겠습니다"

성실함에 감복한 주인이 혼담 넣어 장가
농삿일 걱정에 새신부 두고 물꼬 막으러
화난 장인도 자초지종 듣고 "믿음직"

훗날 큰아들이 아버지 이름으로 진사시
효심 알려져 대리시험 처벌도 받지 않아
아들 헌정 진사 벼슬 덕 '안진사'로 불려


조선 말엽 진영 의전이라는 곳에 민중(珉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민중의 성은 안(安)으로 진례와 진영에 분가해 온 광주(廣州) 안 씨 종파 중의 하나였다.
 
광주 안 씨는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광주 지방에서 공을 세운 안병걸(安邦傑)을 시조로 하는 명문가였다. 문행과 학덕이 높은 선조가 수두룩했을 뿐 아니라,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도덕과 학문이 높아 4대가 지난 후에도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는 불천위(不遷位)가 두 위(位)요, 임진왜란 때도 많은 공신을 냈다. 또 군(君)에 봉해지거나 시호(諡號)를 받은 선조가 여럿이었으며, 청백리가 6위나 되는 절의(節義)의 가문이었다.
 
그러나 청렴한 관리였던 할아버지 대에서 가세가 너무 기울어 민중의 아버지는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사대부로서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은 과거를 보아 벼슬을 하는 것이었지만, 먹고 살기가 너무 급하다 보니 과거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농사라고는 밭 세 마지기가 고작인데도 식구는 다섯이나 되다 보니 민중의 부모는 놉(남의 일을 해주고 품삯이나 음식을 받음)으로 겨우 생계를 이었다. 형편이 그 지경이다 보니 민중은 열 살 무렵부터 이 집 저 집 꼴머슴으로 돌아다녀야 했다. 열다섯 살이 되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민중은 정식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
 
민중의 아버지는 가난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제 근본은 잊지 않을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민중은 비록 글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행실이 단정하고 말이 헛되지 않았다. 머슴이 된 민중은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시키지 않은 일까지 척척 해치웠다. 아직 장정이 되지도 않은 열다섯 살이었지만 일머리가 밝고 책임감이 강한 민중을 주인은 기특하게 여겼다. 그래서 새경을 넉넉히 주었다.
 
머슴살이 삼 년이 지나자 민중의 집에는 얼마간의 땅이 생겼다. 민중의 부모도 더 이상 놉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주인은 민중을 상머슴으로 대우해 주었다. 다시 삼 년을 더 일해 두 동생을 혼인시킨 민중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민중의 나이 스물한 살이 되어 있었다.
 
"허 참. 내 나이가 벌써 이렇게 되었나?"
 
슬그머니 제 나이를 꼽아 보던 민중은 제풀에 풀이 죽었다. 열일곱 무렵이면 장가를 들어야 하는데 스물한 살이나 먹어 버렸으니 노총각도 그런 노총각이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시르죽어 있는 민중을 보고 하루는 주인이 불러 말했다.
 
"이제 자네도 장가를 들어 새살림을 해야지. 자네 짝은 내가 찾아주고 싶은데 어떤가?"
 
그날부터 주인은 민중의 배필이 될 만한 처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수소문을 하다 보니 멀리 진해 웅천 두동(頭洞) 배 씨(裵氏) 집 처자가 심덕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은 배 씨 집을 찾아가 직접 혼담을 넣었다. 그러나 어엿한 양반가문에다 살림도 넉넉한 배 씨 집에서는 금지옥엽 키운 딸을 머슴과 혼인시키려 하지 않았다. 주인은 간곡하게 배 씨를 설득했다.
 
"지금은 비록 내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지만 뼈대가 있는 가문이고, 총각이 여간 어질고 성실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내가 이 먼 길을 왔겠습니까?"
 
손사래를 치던 배 씨도 주인이 사흘이나 조르자 마음이 흔들렸다.
 
"아들도 아닌 머슴의 혼처를 구하려고 이처럼 애를 쓰다니, 세상에 없는 일이오. 나는 저 사람을 믿어 보겠소."
 
머슴한테는 절대 딸을 내줄 수 없다고 펄펄 뛰는 아내를 설득해 배 씨는 민중을 사위로 맞기로 마음먹었다.
 

▲ 그림=김기영 화가

그렇게 민중은 장가를 들게 되었다. 혼례는 보리타작과 모내기를 끝낸 뒤에 치르기로 했다. 장가들어 새살림을 차릴 생각에 민중은 흥이 나서 모판에 볍씨를 뿌렸다. 주인집 농사였지만 민중에게는 자기 농사나 마찬가지였다. 보리타작을 마치고 논에 거름을 듬뿍 넣어 갈아엎은 민중은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모를 심을 때는 논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써레질로 땅을 평평하게 골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았다. 써레질을 못한 민중이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기다리는 사이 혼례날이 닥치고 말았다. 주인은 민중의 혼례에 필요한 일체를 도맡아서 마련해 주었지만 모내기를 하지 못하고 장가를 들게 된 민중의 마음은 무거웠다. 주인이 내 준 나귀를 타고 사모관대를 쓴 민중은 이른 새벽 신부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신부 집으로 가는 길에도 민중은 자주 하늘을 살폈다. 구름이 조금씩 몰려들고 있었다. 어쩌면 비가 내릴 것도 같았고, 그러지 않을 것도 같아 민중은 조바심이 났다. 혼례를 치르고 신방에 들어서도 민중은 자주 방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비가 오면 어쩌지? 논에 물을 대야 모심기를 할 터인데…."
 
아랫머슴에게 비가 오면 논물을 가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지만, 때를 놓치면 물을 다 놓쳐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먼 길을 온 데다 하루 종일 새신랑 노릇을 한 터라 민중은 자기도 모르게 곯아떨어져 버렸다.
 
한밤중에 민중은 귓전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방문을 열어 보니 그렇게 기다리던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민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곤히 잠들어 있는 새색시를 두고 조심조심 방을 나온 민중은 헛간을 찾았다. 헛간에는 짚을 엮어 만든 도롱이와 삿갓이 걸려 있었다. 민중은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다음 삽 한 자루와 지게작대기를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두동마을을 빠져나온 민중은 잰걸음으로 진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웅천에서 장유, 장유에서 진례를 지나 진영까지 가자면 산을 두 개 넘어야 했고, 들판과 고개를 지나야 했다. 비가 내리는 밤길은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민중은 지게작대기와 삽으로 길을 더듬으며 걸었다.
 
히끄무레하게 날이 밝아오는 새벽에 민중은 의전 주인집 논에 도착했다. 빗속을 뚫고 얼마나 부지런히 걸었던지 힘이 다 빠진 상태였지만 민중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 물꼬를 막기 시작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논에 고이는 것을 보고서야 민중은 논두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모심기를 할 수 있겠구나.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민중이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주인과 아랫머슴들이 논으로 달려왔다. 뒤늦게 비가 내리는 것을 알고 물꼬를 막으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논에 나온 주인은 깜짝 놀랐다. 이 논 저 논 할 것 없이 누군가 물꼬를 단단히 막아 두어 논 가득 물이 고이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이렇게 물꼬를 막았을꼬. 우리 상머슴이라면 모를까."
 
그때 아랫머슴이 마지막 논의 물꼬를 막고 논두렁에 주저앉아 있는 민중을 발견했다. 주인은 어이가 없었다.
 
"꿈같은 첫날밤을 보내고 있어야 할 새신랑이 물꼬를 막으러 오다니. 두동에서 의전까지 길이 어디라고, 세상에…."
 
평소에도 신실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집도 아닌 주인집 농사를 위해 첫날밤을 다 보내지도 않고 달려와 준 머슴 민중에게 주인은 감복했다.
 
"어서 집으로 가서 몸을 녹이게. 너희들은 아침을 잘 지어 상머슴에게 올리도록 전하게."
 
주인은 민중으로 하여금 하루를 푹 쉬고 신부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신부가 타고 올 가마며, 배 씨에게 줄 선물도 푸짐하게 마련해주었다.
 
한편 민중의 처가에서는 난리가 났다. 새신랑이 첫날밤 한밤중에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잘 키운 딸을 머슴한테 시집보내겠다고 할 때부터 마뜩잖아 하던 배 씨의 아내는 돼먹지도 않은 혼사를 벌여 딸이 소박을 맞았다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썼던 배 씨는 할 말이 없었다. 주인이 괘씸하고, 민중이 괘씸하여 울화가 치밀었다.
 
"내 당장 가서 주인이고 머슴이고 물고를 내고 와야겠다."
 
이틀이 지나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신랑을 기다리다 단단히 화가 난 배 씨는 길 떠날 채비를 하라 일렀다. 나귀를 타고 힘이 센 머슴 셋을 거느리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신랑과 주인이 나귀 몇 마리를 끌고 대문을 들어섰다.
 
"장인 어른. 인사도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돌아왔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민중이 넙죽 꿇어 절을 올렸다.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배 씨 아내와 신부도 달려나왔다. 주인이 나서 자초지종을 말하자 배 씨는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결례를 하였소이다. 아무리 그래도 장인어른한테 말씀은 드리고 왔어야 하지 않았는가. 어서 잘못을 빌게."
 
민중이 무릎을 꿇고 절하자 배 씨는 얼른 일으켜세웠다.
 
"아닐세, 아니야.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크게 오해를 했었네. 맡은 일에 이처럼 성심을 다하니 정말 믿음직스럽다네."
 
민중은 신부를 데리고 의전으로 돌아왔다. 개미등 아래 작은 집에 새살림을 차린 민중은 한 해 뒤 머슴살이를 그만두었다.
 
"그동안 고마웠네. 이제 내 집 농사는 그만두고 자네 농사를 짓도록 하게."
 
그러면서 주인은 민중에게 전답을 떼주었다. 장인인 배 씨도 사위의 사람됨을 알고 재산을 나눠주어 민중은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다.
 
민중에게는 세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들이 모두 영특하고 행실이 단정했으며, 효심이 깊었다. 민중은 아들들을 서당에 보내 학문을 닦게 하고, 자신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세월이 흘러 큰아들이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게 되었다. 큰아들은 집안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머슴살이에 농삿일을 묵묵히 해 온 아버지를 위해 과거 시험지에 제 이름 대신 아버지 이름을 써 넣었다. 큰아들이 쓴 과거 시험지가 시험관의 눈에 들어 장원을 하니, 안민중은 늘그막에 갑자기 진사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리시험에 해당해 급제 무효가 되어야 할 사안이지만, 큰아들의 효심과 민중의 평소 사람됨이 참작되어 큰아들은 죄를 받지 않았다. 또 그때부터 사람들은 민중을 꼬박꼬박 안진사라 불렀다. 아버지에게 진사를 헌정한 큰아들은 농사를 지으며 평생 아버지를 공경하고 받들며 살았다고 한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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