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교사가 있었다. 학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집으로 가는 기차가 올 때까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차에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영어교사에게서 서예를 배웠던 제자들은 이제 어른이 됐다. 제각기 자리를 잡아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제자들은 명절이나 연말이 되면 스승을 잊지 않고 찾는다. 영어교사로 정년퇴임한 서예가 이성곤(65) 씨는 현재 그 고등학교 인근에 살고 있다. "진영제일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글씨를 썼던 그 기억은 제게 무척 소중합니다. 그 기억이 저를 진영에서 살게 했습니다." 이성곤의 서실 '진재탁마실(眞齋琢磨室)'을 찾아가 보았다.

▲ 이성곤의 손에서는 붓이 떠나는 날이 없다.
아버지가 쓰고 묶은 빛바랜 '천자문'
외우고 붓글씨로 쓰며 간직해온 '가보'
고교 영어교사 시절 방과후 시간 쪼개
학생들에게 묵향 세계 일러주고 가르쳐
퇴임 후에도 서예·한문강좌 교실 혼신
김해선면작가협회장 맡아 전시회 준비

이성곤의 '진재탁마실'은 진영읍 진산대로 26번길 24-14의 4층에 있다. '진재'는 이성곤의 호이고, '탁마'는 끊임없이 갈고 닦는 수행을 의미한다. 서실에는 그가 글씨를 쓰는 방, 서예와 관련된 책과 평생 읽었던 책들이 가득한 방,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방들이 있다. 글씨를 쓰는 책상에서는 창문 아래로 진등공원의 봄꽃과 물오른 나무들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는 "개인정원이나 마찬가지"라며 환하게 웃었다.

책이 가득한 방에서 이성곤은 <천자문> 한 권을 보여주었다. "밀양 단장면에서 태어났어요. 사랑방에서 아버지가 동네 청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 삶의 지혜도 가르쳤어요. 선비 집안이었지요. 이 천자문은 아버님이 19세 때 쓰고 묶은 책입니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천자문>에서는 얼핏 보기에도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콩기름을 먹인 종이의 일부는 긴 세월을 말해주듯 변색되기도 했다. 마치 인쇄를 한 것처럼 고르고 바른 획으로 한 쪽마다 24자가 적혀 있었다. 전통제책 방식을 그대로 따라 포배장에 오침안정법으로 묶었다. 포배장은 글씨를 쓴 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종이를 접는 방식이다. 큰 종이에 48자를 쓰고 그것을 반으로 접어 한 쪽에 24자가 보이게 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천자문>에서 몇 장이 떨어져 나갔어요. 빠진 부분은 제가 글씨를 써 넣었지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천자문>을 가리켜 그는 '우리 집의 가보'라고 말했다. 책장에는 부친이 보던 문집들도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고금의 아름다운 문장들과 한시들을 모아 엮은 책이었다. 그 문집에서 오랜 묵향이 느껴졌다.

"아버님의 사랑방은 특히 농한기 때에 천자문을 배우러 오는 동네 청년들로 넘쳐났지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장면을 보고 자란 덕에 저도 자연스럽게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다 외웠지요. 제가 그리 배웠으니 다른 아이들도 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학교에 들어가 처음 교과서를 받았을 때 시멘트 봉투처럼 우툴두툴한 종이로 표지를 싸고 제가 직접 글씨를 썼습니다. '국어'를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집주소와 이름을 썼지요. 선생님이 '누가 썼냐'고 묻기에 '제가 썼다'고 답했더니 거짓말하지 말라며 야단을 치더군요."

▲ 부친이 19세 때 쓴 <천자문>은 이성곤에게 '가보'나 다름없다.

<천자문>을 외우면서 붓을 들고 글씨를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친 옆에서 글씨를 썼던 그가 초등학교 때 동네에 초상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만장을 직접 쓰기도 했다. 학창 시절 그가 수업을 받던 교실 뒤 게시판에는 항상 그의 글씨가 붙어 있었다. 수업과 상관없이 그는 서예를 늘 가까이 했다. 그는 동아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는 시국 관련 격문을 제 글씨로 써서 학내에 붙이기도 했지요." 붓글씨로 쓴 그의 격문은 어땠을까. 무척 궁금했다.

영어를 전공하고 영어교사가 된 이성곤이 서예가로 살고 있는 것은 그가 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해온 데에서 연유를 찾을 수 있었다. "진영제일고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수업이 끝나면 한림 등 먼 곳에 사는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야 했죠. 그런데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기차 시간을 기다리느라 학교 주변에 남아 있곤 했어요. 명색이 선생인데, 아이들이 일없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뭐라도 가르치고 싶었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서예를 가르쳤습니다. 서예라는 게 말입니다. 허리를 곧추 세워 바른 자세로 앉아야 하고, 글씨를 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죠. 또 좋은 내용의 바르고 아름다운 글귀를 써야 하는 공부입니다. 절로 공부가 되는 거지요.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문화축제, 밀양 아랑제에도 나갔어요. 상을 받아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들도 기뻐했지요."

이성곤은 이후 창원여고, 함안고, 창원명지여고, 청원명곡고, 마산여고, 창원기계공고 등에서 근무할 때도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서예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 했다. 학교에서의 서예는 2013년 퇴직할 때까지 계속됐다. "여러 학교에서 함께 글씨를 계속 썼지만, 진영제일고 제자들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당시 화선지를 살 돈이 없어서 학교에서 나오는 이면지를 모두 모아서 학생들도 쓰고 저도 쓰곤 했지요. 다 쓴 종이를 모아 고물상에 주면 비누로 바꿔줬어요. 학생들이 비누를 한 장씩 집에 가져갈 정도였으니 얼마나 열심히 썼는지 짐작이 되시나요?"

이성곤이 퇴직하던 날 사업가로 성공한 한 제자가 편지를 낭송했다고 한다. 내용은 이랬다. "어느 날 이성곤 선생님에게 잡혀가서(?) 서예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가슴 속에 희망을 품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그러면서 그 제자는 눈물을 지었다고 했다. 제자들은 '진묵회'라는 모임을 지금도 계속 하면서 명절 때면 꼭 스승을 찾아온다. 지금은 모두 사회에서 제 몫을 당당히 수행하는 자랑스러운 제자들이라며 이성곤은 뿌듯해 했다. "제자들은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운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서예를 배운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영어를 가르쳐 명문대에 보낸 제자들은 연락이 뜸한데 서예를 가르친 제자들은 늘 찾아옵니다. 진영에서 6년을 살고 떠났습니다. 퇴직하기 5년 전에 다시 진영으로 돌아와서 글씨를 계속 쓰고 있는 이유는 진영제일고 시절의 추억 때문입니다."

▲ 이성곤이 사용하는 벼루. 크고 무겁다.

이성곤은 1982년부터 '진영필봉회'의 서예 지도를 시작했다. 진우원, 평생교육기관 서예지도 등 서예를 통한 사회봉사활동도 꾸준히 해 왔다. 2003년부터는 진영문화의집에서 '진영서도회' 서예지도와 한문강의를 시작했다. 지금은 김해와 창원 등 6곳에 출강을 나가고 있다.

"문화의집이나 공공도서관 등에서 그냥 '서예교실'이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름을 새로 다 지었습니다." 그가 지은 이름을 보자. 진영문화의집 서예반은 '진영서도회', 김해문화의집은 '분성서도회', 진영한빛도서관은 '금병초대작가회', 한문을 강의하는 진영문화의집은 '금병한문고전반'이다. 그냥 '서예교실'보다 훨씬 고풍스럽고 일단 가입하면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이름들이다.

이성곤은 교사로 근무할 때보다 요즘 더 바빠졌다고 한다. 퇴직 후 서예강좌와 한문강좌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서예는 오랜 취미였지만, 어느 순간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 셈이다. 철학자 칸트는 '취미는 미를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규정했고 취미가 직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자신이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이야기다.

"가르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고 말하는 그는 타고난 선생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더 좋아하는 것은 배움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호학(好學)과 인(仁)으로 압축되는 실천 철학입니다. 공자는 '나더러 배움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럽다'고 했을 만큼 배움을 중시했지요. 저 역시 큰 스승을 찾아가 배우고, 가르쳐야 할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다시 가르치는 일이 가장 즐겁습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다른 일이 아니라는 그는 강의를 하러 나갈 때면 단정한 모습으로 나선다. 수업을 한다는 것은 배우가 무대에 서는 것과 같기 때문에 외양이나 몸짓과 말투는 물론 마음가짐도 모두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곤은 김해선면작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아 김해문화의전당 윤슬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단오를 전후해 행사를 여니 6월에 전시회가 열린다. 프로에서 아마까지 모두 함께 전시를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합죽선에 올린 그림과 글씨가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이성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이성곤은 어린 시절부터 동네 청년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부친 옆에서 글을 배우고 글씨를 썼다. 그의 삶에서 서예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의 실천'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이 '누실명(陋室銘)'이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산은 높지 않아도 신령이 산다면 영험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으나 용이 산다면 영험한 물이로다.' 내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이성곤
김해선면작가협회 회장, 한국서가협회 김해지부 회장, 한국서예협회 김해지부 부지부장, 창원한문고전강독회장, 한국문화예술협회 부회장. 경남 교원예능대회 서예부문 일등급, 한국서예협회 경남서예대전 입선 7회·특선4회, 대한민국 공무원미술대전 서예부문 입선 7회, 대한민국 행촌서예대전 입선 8회·특선 1회, 한국추사서예대전 입선 6회, 한국서가협회 부산서예전람회 대상 수상. '추사체연구' 이성곤 개인서예작품전(1994, KBS창원방송총국), '정년퇴임기념' 진재 이성곤 개인서예작품전(2013, 창원성산아트홀). 진영서도회·용지묵향회·분성서도회·참사랑서도회·금병초대작가회·금병한문고전반 출강.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