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사 맥 이은 가야불교 요람 중봉사
불모산 산삼 효험 장군수에 중생 밀물
절 살림 흥했지만 적선 않고 재물탐닉
사미에게 업힌 노승 "중봉사로 가자"
대웅전 뒤편 산삼 모두 캔 뒤 빈대 풀어
승려들 하나 둘 떠나고 몇년 뒤 빈 절만
1.
김해 장유 불모산은 일곱 왕자를 출가시킨 허황옥 왕후를 불모(佛母)로 추앙하여 붙인 이름이다. 허왕후가 수로왕과 첫날밤을 치른 곳에 세워진 왕후사가 있었고, 이후 임강사와 장유사 등이 맥을 이었던 가야불교의 요람에 중봉사(中峰寺)라는 절이 있었다.
중봉사가 있던 자리로 밝혀진 곳은 불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부채꼴 모양의 골짜기를 따라가다 제미지(濟彌池·능동저수지)에 이르는 능동 시냇가다. 최근까지도 이 주변에서 기와 파편이 발견된다 하고, 동국역경원에서 간행한 불교용어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으니 중봉사는 여러 말사를 거느린 비교적 규모가 큰 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언제 창건되고 폐사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에 말사로 추정되는 팔성암(八聖庵) 터가 진례면 신안에서 확인되었고, 부근에서 발견된 마애불이 통일신라 후기 혹은 고려 초기 양식이라 하니 중봉사의 창건 시기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또 팔성암에 대한 기록이 1786년까지 등장하다가 1832년 무렵에 없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폐사시기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중봉사를 유명하게 한 것은 남쪽에서는 보기 드문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군수라는 약수 때문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감로수에 비유하고, 그 감로수를 일체 중생이 함께 마신다는 의미에서 사찰에서는 대개 창건과 함께 대웅전 옆에 약수터를 갖춘다. 약수는 효능에 따라 상, 하, 최상으로 나누는데 중봉사 약수는 최상급에 속하는 장군수였다. 불모산에 산삼이 많았다니 산삼의 정기가 중봉사 약수에 응축되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 장군수를 몇 달 마시면 웬만한 병은 깨끗이 낫고, 건강한 사람은 장군처럼 힘이 세지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중봉사에는 장군수를 마시고 병을 고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끓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매일 꾸역꾸역 모여드는 사람들을 중봉사에서 먹이고 재울 수는 없었을 터. 중봉사 절문 앞에 주막과 밥집이 하나 둘 들어서더니, 급기야 삼문리(삼문리) 혹은 사문리(사문리)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중봉사도 흥해서 상주하는 승려가 백 명이 넘었다. 승려들의 건강을 지키고 중생의 갈증을 달래주어야 할 감로수 덕분이었지만, 중봉사에서는 절문 밖에 일체 적선을 하지 않았다. 중봉사에서 밥을 지을 때면 쌀을 씻은 물이 멀리 대청천까지 뿌옇게 흘러내렸고, 장군수를 마시러 왔다가 삼문리 마을 밖에 움막을 치고 지내던 사람들은 이 때를 기다려 제각기 그 물을 길어와 끓여 먹었지만 밥 한 끼 베풀지 않았다.
장군수를 오래 마신 승려들은 건강하고 힘이 넘쳤으나, 그 때문에 성정이 포악하고 탐욕스러웠다. 불전에 쌓이는 재물로 절문 앞에 모인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기는커녕 능동이며 제을미향까지 전답을 사들여 고리채를 놓았으며, 절문 앞에 들어선 점포들을 상대로 자릿세를 받았다.
또 빈손으로 장군수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을 박대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더니, 어느 때부턴가 산문 앞에 사천왕처럼 무서운 형상을 한 승려가 지키고 서서 드나드는 사람을 관리하기 시작하니, 많은 사람들이 절집의 인색함을 원망했다.
2.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에, 삼문리 한 주막에 노승을 업은 사미(어린 남자 승려)가 나타났다. 말이 없고, 순종적인 눈빛을 한 건장한 체구의 사미는 노승을 평상에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사미에게 업혀 온 노승은 깡말랐지만 병색은 없었으며 눈빛이 맑고 초롱했다. 노승의 목에는 대나무 통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사미는 물을 찾아 한 바가지 떠서 노승에게 공손히 올렸다. 노승이 한바탕 마시고 남은 물을 사미는 조심스럽게 마셨다.
"스님들은 어디서 오셨소?"
주모가 데면데면한 얼굴로 초라한 행색의 두 승려를 훑어보았다. 사미가 공손히 합장하며 대답했다.
"지나가는 길에 중봉사 구경이나 할까 하고 들렀습니다."
"그럼 중봉사로 갈 것이지 주막에는 왜 들었소? 하긴 중봉사에서 아무 스님이나 다 받아주지 않는다 합디다."
"산중에서 오래 지냈는지라 시정 구경을 할까 하고…."
사미는 주모의 경박한 말에도 공손하게 방 한 칸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주모는 노승을 흘깃거리더니 매몰차게 말했다.
"방값을 곱절로 쳐 준다면 모를까, 스님은 안 받아요."
"방값 곱절을 내라니, 무슨 경우가 이렇습니까?"
어이없는 주모의 요구에 사미가 따지자 주모도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장사를 하자면 꼬박꼬박 바쳐야 하는 시줏돈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거 참 불경스럽소. 시줏돈은 마음을 내는 것이지 꼬박꼬박 바치는 것이 아니오."
사미가 토를 달자 주모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따지고 싶거든 저기 중봉사에 가서 따지시오. 스님을 재워주면 중봉사 원주스님이 좋아하지 않을 테고, 국밥이나 술을 팔아줄 것도 아니니 이래저래 득 될 게 하나도 없소이다."
그때 노승이 사미를 불렀다. 낮고 뼈가 있는 목소리였다.
"우지야. 그만 가자."
우지라 불린 사미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노승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곧 한없이 공손한 자세로 스승을 업고 주막을 나섰다. 사미는 노승을 업고 다른 주막을 찾았다. 어느 주막에 가나 터무니없이 비싼 방값에다 술이며 고기국밥을 사 먹어야 한다고 했다.
"스승님. 방값이 터무니없이 비싸니, 멀리 민가라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기울어지는 해를 보며 사미가 걱정했다. 노승은 눈을 감은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미는 노승을 업고 주막거리를 다 지나 마을 밖에 이르렀다. 방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거적을 깔고 지내고 있었다. 더러는 움막을 치고 여러 명이 오글오글 모여 있기도 했다.
사미는 병든 아이를 안고 앉아 있는 노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참혹한 병자들의 모습을 보니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노승이 대나무 통으로 사미의 머리를 탕 쳤다.
"우지야. 중봉사로 가자."
"예?"
"주모의 말이 맞다. 명색 중이 절을 앞에 두고 어디서 묵는단 말이냐."
노승의 말에 사미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미는 스승을 업고 저자거리를 지나 중봉사로 향했다. 산문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골이 장대한 두 승려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리 승려라 해도 함부로 들이지 말라는 주지스님의 명이 있었소."
젊은 승려가 시건방진 투로 말했다. 노승이 손을 들어 조용히 말했다.
"영축총림 보타암에서 왔네."
젊은 승려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한 듯 요사채 구석에 딸린 작은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사미는 스승을 바닥에 내려 쉬게 한 뒤 공양간을 찾아갔다. 밥때가 지났기 때문에 먹을 게 없다는 공양주에게서 사미는 겨우 누룽지 한 줌을 얻었다. 누룽지를 솥에 넣고 정성껏 삶은 다음 사미는 스승에게 올렸다.
"새벽에 할 일이 있으니 잠을 좀 자 두도록 해라."
스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미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3.
이른 새벽, 사미는 스승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방바닥에 커다란 자루가 놓여 있었다.
"이제 가자. 그만 일어나거라."
사미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노승을 쳐다보았다. 노승이 대나무 통으로 사미를 탕 때렸다. 그리고 대나무 통 뚜껑을 열더니 방바닥에 툭 던졌다. 대나무 통에서 오동통하게 살이 찐 빈대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빈대는 정신없이 방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사미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룻밤 잘 잤으니 방값을 내야 하지 않겠느냐. 여긴 먹을 게 많으니 살기 좋을 것이야."
방안에 빈대를 풀어놓은 노승은 사미더러 자루를 이게 했다. 자루를 인 사미가 일어서자 노승은 사미의 등에 매달렸다. 노승을 업고 자루를 인 채로 사미는 이른 새벽 중봉사를 빠져나왔다.
"스승님. 이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냄새가 납니다."
"대웅전 뒤에 깊이 숨어 있던 산삼이니라. 여러 대중을 구제해야 할 산삼의 정기를 중들이 독차지하고 있어서 내가 다 캐버렸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것입니까?"
노승이 킁, 콧바람을 일으키며 말했다.
"가는 길에 산삼을 나눠줘야 하지 않겠느냐."
노승은 주막거리를 지나 움막촌에 도착하자 사미를 멈추게 하여 산삼을 아픈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게 했다. 그런 다음 노승은 다시 사미에게 업혀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노승과 사미가 다녀간 후 중봉사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요사채를 비롯한 절 구석구석에서 빈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글납작한 이 흡혈곤충은 닥치는 대로 승려들의 피를 빨아먹었다. 빈대에 물린 승려들은 가려움을 견디지 못해 옷을 벗고 몸을 긁었다.
그렇게 빈대와 전쟁을 치르던 중봉사 승려들은 며칠이 지난 뒤에야 장군수의 맛이 변해버린 것을 알았다. 약수터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고, 돌확(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장군수의 맛이 변했다는 소문과 함께 중봉사를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길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절문 앞 삼문리 주막이며 국밥집은 모두 문을 닫았다.
늘어나는 것이라곤 중봉사 요사채의 빈대 밖에 없었다. 빈대를 잡기 위해 승려들은 날마다 이불이며 옷가지를 빨고 삶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승려들은 빈대 때문에 염불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사방에서 덤벼드는 빈대를 견디지 못해 절을 떠나는 승려가 하나 둘 늘어났다.
장군수를 찾아오던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고 빈대 때문에 승려가 떠나버린 중봉사는 결국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폐허가 되어 버렸다.
김해뉴스
조명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