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길운팥칼국수'의 팥칼국수와 호박죽. 오른쪽 사진은 오길운 대표가 소백산 자락에서 재배한 토종 팥을 한줌 쥐어보이고 있는 모습.
어릴적 동짓날이 되면 할머니는 팥죽을 쑤어 놋그릇에 담아 장독대에 두셨다. 겨울 밤기운에 차갑게 식은 팥죽은 동치미 한 사발과 함께 상에 올랐다.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먹던 찬 팥죽과 동치미의 궁합은 어린 입에도 별미였다. 단맛을 갈망하던 때라 설탕도 제법 넣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지(冬至)는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이를 두고 흔적만 남아 있는 노루 꼬리에 빗대 '동지섣달 해는 노루꼬리만 하다'는 속담도 전한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동지를 기점으로 밤이 짧아지는 대신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진다. 그래서 예로부터 동지를 태양의 부활 혹은 그해의 시작으로 여기는 관념이 있었고, 설날에 버금가는 '아세(亞歲)' 곧 작은설이라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동지에는 팥을 고아 죽을 만들고 여기에 찹쌀로 단자를 만들어 넣어 끓이는데, 단자는 새알만한 크기로 하기 때문에 새알심이라 부른다. 가정에서는 팥죽을 각 방과 장독, 헛간 같은 집안의 여러 곳에 놓아두었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었다. 집안 곳곳에 팥죽은 놓는 것은 축귀(逐鬼)의 뜻으로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함이다. 이는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붉은색을 벽사색이라 한다. 서원이나 향교 앞에 홍살문을 두거나, 부적 색깔이 빨간 것이나, 아들을 낳으면 대문에 금줄을 치고 마른 고추를 끼우거나, 소주를 내릴 때 소줏고리 주둥이에 붉은색의 고추를 다는 것 등이 모두 같은 맥락이다.
 
그럼 하고 많은 붉은색 가운데 왜 굳이 팥죽이었을까? 이 풍습에는 축귀의 염원과 함께 먹을 것이 귀한 겨울철의 영양보충까지 고려한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 있다. 팥에는 단백질은 물론이고 지방, 당질, 섬유질, 칼륨과 비타민 B1등 쌀에는 부족한 영양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팥과 찹쌀이 만난 팥죽의 궁합은 그래서 절묘하다.
 
세대가 바뀌고 생활 환경의 변화로 축귀의 의미는 점점 옅어졌지만, 동지팥죽의 인기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죽전문 프랜차이즈 '본죽'에 따르면 작년 동짓날인 12월 22일 하루에만 총 16만2천 그릇의 동지팥죽을 판매했다고 한다. 1초에 두 그릇 가까이 판매된 셈이다. 8만7천 그릇이 판매된 2008년 대비, 2년만에 2배 이상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설명이다. 농경시대에 정착된 세시풍속을 현대인들 나름대로 수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팥죽이 동지에만 먹었던 음식은 아니다. '복죽'이라고 해서 삼복에도 많이 먹던 음식이다. 특히 궁에서는 초복, 중복, 말복에 매번 팥죽을 쑤어 먹었다고 한다. 삼복에 팥죽을 먹으면 더위를 쉽게 물리치고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는 팥이 소갈증과 설사 등을 치유하는 데 효험이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팥의 효능은 현대 의학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팥은 곡류중에서 비타민 B₁함량이 가장 높다. 비타민 B₁은 우리 몸의 신경과 관련이 깊어 섭취가 부족해지면 식욕부진이나 피로, 수면장애, 기억력 감퇴, 신경쇠약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때문에 정신적으로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수험생들에게 좋은 식품이다. 또한 칼륨은 염분에 들어있는 나트륨을 분해하기 때문에 염분으로 인한 붓기를 빼주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 섬유소는 변비 예방과 해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팥에는 사포닌 성분과 콜린색소가 있기 때문에 천연세안제로 이용하면 피부트러블을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팥의 가치가 부각되면서 최근 팥으로 만든 음식이 각광받고 있다. 특히 일상적으로 한 끼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팥칼국수가 인기다. 팥칼국수는 원래 전라도의 전통 음식이다. 전라도에서는 팥죽에 새알심만 넣은 것을 동지죽, 면을 넣은 것을 팥죽이라고 불렀다. 대개 동지에는 동지죽을 먹고, 여름에는 팥죽을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라도식 팥죽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타 지역의 팥죽과 구분하기 위해서 '팥칼국수'라는 명칭이 붙었다.
 
'오길운팥칼국수'는 김해에 제대로 된 팥칼국수를 만드는 집이 있다며 소개를 받은 곳이다. 우선 팥칼국수 전문점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흥미롭다. 전업주부였던 오길운(49)대표는 4년 전 가게를 창업했다. 외식업계 초보인 오 대표는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식당을 운영하고 싶었고, 그래서 찾은 아이템이 팥칼국수와 호박죽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팥칼국수다 보니 재료 선택에 남다른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팥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가지 않는 음식이니 원재료인 팥이 좋아야 함은 당연지사. '오길운팥칼국수'에서는 소백산 자락에서 키운 토종팥 만을 사용한다. 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오 대표는 취재가 시작되자마자 팥 자루부터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새끼로 만든 광주리에 쏟아 놓은 붉은 팥의 강렬함이 인상적이다. 가장 자리가 둥글고, 색이 고르고 광택이 돌며, 흰색의 띠가 선명한 것이 사전조사차 익혀 두었던 좋은 팥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헌데 이 좋은 국산 팥이 문제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기상이변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가격이 폭등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도매가 기준으로 상품 40Kg에 2010년 4월에 16만9천원이던 것이 올해 4월에는 34만5천원에 거래되고 있다. 무려 두 배 넘게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진작부터 가격 인상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오 대표는 취재 당일, 4천원이던 팥칼국수 가격을 4천5백원으로 전격 인상했다. 기사가 게재되고 난 후에 값을 올리면 오해를 받을까봐 단행한 조치라지만, 기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할 수밖에 없다. 모쪼록 '오길운팥칼국수'의 오랜 단골들께는 죄송할 따름이다.
 
하지만 국산 팥을 사용하면서 4천5백원이라는 가격은 여전히 착한 가격이다. 경기도의 유명한 'ㅁ팥죽' 대표는 고객들의 호불호가 나눠지자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저희 ㅁ팥죽에서는 국산팥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산팥 80kg(한가마) 시중가 7십만원, 중국산팥 80kg(한가마) 시중가 2십7만원. 저희는 경동시장 쌀상회에서 국산팥만 구입해오고 있습니다. 국산팥이 비싸서 3월 중순부터 팥죽, 팥칼국수는 가격을 인상할 예정입니다. 저희 홈페이지에 악성글을 올리시는 분이 계신데, 5천원 이하로 저렴하게 받는 곳은 국산 팥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현재 'ㅁ팥죽'에서는 팥칼국수 한그릇에 7천원을 받고 있다.
 
일부 팥칼국수 전문점에서는 팥을 삶는 시간을 단축 시키기 위해 소다를 넣거나, 걸쭉하게 만들기 위해 전분을 섞기도 한다. 이러면 팥이 가진 고유의 풍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설탕으로 맛을 흐리기 일쑤다. 악순환이다. 따라서 애써 좋은 팥을 구해 만든 팥칼국수는, 팥이 가진 고유한 풍미를 살리기 위해 일체의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고, 따라서 팥의 사용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선순환이지만 그만큼 재료비가 많이 든다. 음식의 맛은 재료에 달렸지만, 그 선택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따라서 좋은 음식점과 나쁜 음식점은 그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인장의 마음 가짐에 달려있다.
 
'오길운팥칼국수'에서는 삶은 팥을 손님의 주문을 받은 다음 믹서기에 갈고 이를 다시 데워서 칼국수를 말아 낸다. 삶은 팥을 미리 갈아 놓으면 쉬이 삭아버리고 색이 탁해지기 때문이다.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지만 경험으로 터득한 최선의 방법을 따른다.
 
좋은 재료에 정성까지 더해지니 팥칼국수는 부드럽고 곱다. 호들갑 떨며 '진하다', '고소하다' 따위의 형용사를 남발할 음식이 아니다. 좋은 팥이 낼 수 있는 향과 질감을 온전히 담고 있을 뿐이다. 일체의 첨가물이 없으니 특별한 맛은 없다. 먹다보면 곡물이 본디 가진 은근한 단맛이 슬쩍 느껴진다.
 
그 슴슴함이 묘하게 입맛을 당긴다. "돌고 돌아 결국엔 오길운팥칼국수에 정착한다"는 단골들의 말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아주 오래간만에 만나는 순한 음식이다. 식탁에 설탕과 소금이 놓여 있지만 굳이 도움 받을 필요를 못느낀다. 특히 이집 팥칼국는 식었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 부드러움은 여전한 대신, 농도는 더 걸쭉해지고 슴슴하던 맛은 점점 선명진다. 어릴적 동짓날 밤에 먹었던 그 맛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팥칼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몸도 마음도 차분해 지는 느낌이다. 왜 조상들이 '복죽'이라 부르며 굳이 삼복 더위에 뜨거운 죽을 쑤었는지 짐작이 간다. 또한 팥에 함유된 사포닌 성분은 술을 먹고 난 후에 쌓이는 주독(酒毒)을 풀어주고 체내 수분 배출을 돕는다. 따라서 애주가들은 팥칼국수를 해장식으로도 한번 활용해 봄직하다.
 
팥칼국수가 심심하다 싶으면 단호박과 늙은호박을 섞어 만든 호박죽도 추천할만 하다. 밀가루로 만든 면을 선호하지 않을 경우에는 팥칼국수 대신 새알심을 넣은 팥죽(6천원)을 선택할 수 있다. 탁 트인 창 너머로 펼쳐지는 해반천과 연지공원의 녹음이 음식 맛을 더욱 각별하게 한다.


Tip. 메뉴와 연락처 ────────
▶팥칼국수, 호박죽, 팥죽, 들깨칼국수, 검정콩국수 (3천500원~6천원)
▶영업시간:오전 11시 ~ 오후 9시 (연중 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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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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