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 발발한 지 이틀만에
 죽도에 도착한 왜군 김해성 공격 채비
 이대형·송빈·김득기 "성을 지키겠다"

 왜군, 1차 공격 이틀 뒤 대대적 침략
"도적놈들에게 성을 내어줄 수 없다"
 결사항전으로 두번의 공격 막아내는데…

1.
1592년 임진년 전쟁은 음력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1번대가 절영도에 배를 대고 부산진과 다대포, 동래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틀 뒤 가토 기요마사가 2번대를 이끌고 언양과 경주를 통해 한양으로 길을 잡을 예정이었고, 구로다 나가마사가 지휘하는 3번대는 4월 14일에 다대포를 거쳐 장락포(獐洛浦·녹산면)를 경유, 죽도(竹島·가락면)에 도착했다. 구로다는 조선말에 능한 군사로 하여금 지세와 정보를 살피게 하면서 영남 내륙의 관문이자 호남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인 김해성을 칠 준비에 들어갔다.
 
부산진으로부터 왜군이 침략했다는 봉화가 피어오른 하루 뒤인 4월 14일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은 부산진성과 다대포진, 동래성이 고니시 유키나가에 의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진주에 내려와 있던 경상감사 김수(金수)에게 파발을 보낸 김해부사는 창원에 진주해 있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조대곤(曺大坤)에게도 김해성의 위급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의령, 함안, 합천 등의 부사와 군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또 지역의 유지인 이대형(李大亨)과 송빈(宋賓)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냈다.
 

▲ 그림=범지 박정식

이대형은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보이며 함안 산인면에 고려동이라는 자치구역을 형성하고 마지막까지 고려의 신하로 살다 간 모은 이오(李午)의 6대손이었다. 이대형은 재령 이씨 특유의 엄격한 성품에 신의가 있었고, 성정은 부드러웠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했으나 경시에서는 번번이 낙방한 이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신어산 아래에 관천재(關川齋)를 짓고 살면서 양친을 봉양하고 있었다. 김해부사의 인척이기도 했던 이대형은 서찰을 받고 아들 우두(友杜)와 사두(思杜)를 불렀다.
 
"나는 비록 벼슬이 없으나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나라가 지금 위급하니 나는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이우두와 이사두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함께 싸울 것을 자청했다. 그러나 이대형은 함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을 아껴 선조의 대를 끊지 않고 이어나가는 것 또한 충임을 들어 두 아들을 피난하게 했다. 그리고 마을을 돌며 1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4월 15일 김해성으로 갔다. 김해부사는 몹시 기뻐하며 공진문(拱辰門·북문)을 지키도록 했다.
 
같은 시각에 김해부사의 서찰은 진례 담안마을 송빈에게도 전달되었다. 청주 송씨 집성촌인 담안은 김해부에서 마을을 담으로 둘러 특별히 보호할 정도로 덕망과 학식을 갖춘 선비가 많은 마을이었다. 송빈은 이대형과 마찬가지로 향시에 합격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경시의 벽을 넘지 못했다. 송빈은 천성이 맑고 깨끗했으며, 풍채가 보통이 넘는 장사로 의로움을 사랑했다.
 
김해성이 위급하다는 서찰을 받은 송빈은 주촌 팔성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는 큰아들 정백(廷白)에게 갔다. 출정의 뜻을 알린 송빈은 정백으로 하여금 집에 가서 어머니와 아우들을 살피도록 했다. 그리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격문을 써서 여러 마을에 돌렸다. 이튿날 격문을 보고 모인 의병과 함께 김해성에 들어가니, 벗인 이대형과 김득기(金得器)가 와 있었다.
 
김득기는 거인리(居仁里·외동) 사람이었다. 성품이 담담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공손했으며, 평소 습관이 검소하고 가법이 엄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일찍 무과에 급제했으나 당쟁이 난무하는 중앙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김득기는 효심이 깊고 출세에 뜻이 없었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깊었다. 난리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된 김득기는 17세의 아들 간(侃)에게 병중인 아내 신씨(辛氏)를 부탁했다. 그리고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입고 있던 도포와 함께 6대 독자 아들에게 주고 김해성에 들어와 있었다.
 
이대형과 김득기, 송빈은 김해성을 지키는 데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김해부사는 송빈을 중군도총으로 삼아 서문을 지키는 소임을 주고, 김득기에게는 해동문(海東門·동문)을 맡겼다. 또 합천 초계에서 군수 이유검(李惟儉)이 병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중위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이로써 김해성은 비로소 왜군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뿔뿔이 흩어져 피난하기에 급급하던 부민들이 김해성을 지키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며 의병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그때 김해부에서 점고한 군사는 속군과 속현의 군사 600명에다 의병을 합쳐 1천 명이었다. 김해부사는 군사 1천 명과 피난민 1만 명이 먹을 군량 조달의 일을 이인지(李麟趾)에게 맡겼다. 이인지는 즉각 성내를 돌며 군량을 모았다. 그러나 이제 막 보리가 피기 시작한 4월 보릿고개였다. 먹을 만한 것이라곤 깡그리 쓸어 모아도 사흘치가 채 되지 않았다. 초계군수가 이를 보고 성급히 말했다.
 
"다대포와 부산진성, 동래성이 무너지는 데 한 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번 왜구의 침입은 예사롭지가 않아요. 승산을 잘 따져 보아야 합니다."
 
초계군수는 공명심이 많았다. 합천 초계는 영남 내륙이라 비교적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김해부사의 서찰을 받고 초계군수는 작은 공을 세워 벼슬을 높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김해성에 와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왜군의 수가 20만이라느니, 30만이라느니 하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초계군수를 불안하게 한 것은 자신 외에 어떤 지역에서도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라를 침범한 적을 맞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나라의 은혜를 입은 자의 도리일 것이오. 어찌 승산을 따져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오? 김해부는 특히 들판이 넓고 비옥하여 물산이 많으며 삼포(三浦·동래 부산포, 웅천 내이포, 울산 염포)와 가까우니 군관민이 합심하여 방어해야만 하오."
 
송빈이 우렁찬 목소리로 훈계하며 노려보았다. 김득기, 이대형도 송빈에게 합세하니 초계군수는 오금이 저려 입을 다물고 말았다.
 
4월 17일 마침내 왜군이 김해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는 척후병의 전갈이 왔다. 왜군은 죽도에서 강창(江倉·서부동)과 불암창(佛巖倉·불암동)으로 나뉘어서 쳐들어왔다. 그 수가 1천 명이 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한 김해부사는 피난민들을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았다.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탄탄하며, 성곽을 둘러싼 성호(城濠·해자)가 깊었다.
 
해동문과 진남문 앞에 도착한 왜군은 곧바로 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높은 성곽과 성호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왜군은 오후가 되어서야 조총과 화살을 쏘면서 전투 분위기를 조성했다. 왜군의 수가 조선군과 비슷한 것을 보고 초계군수는 괜한 걱정을 했다며 마음을 놓았다. 초계군수의 눈에는 왜군이 오합지졸로 보였다. 김해부사 또한 왜군을 가벼이 여기므로, 김득기가 크게 우려하며 말했다.
 
"경적필패(輕敵必敗)라,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패합니다. 한나절만에 부산진과 동래를 무너뜨린 왜군이니, 한 번 싸움으로 끝장을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송빈과 이대형도 신중하게 대처할 것을 건의했다. 김해부사는 하는 수 없이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날이 저물자 조선군은 성문을 열고 왜군 진영을 습격했다. 왜군 진영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곧 진을 흩트리고 달아났다. 이때 목이 달아난 왜군의 수가 수백에 이르렀다.
 
김해성에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군사들과 의병, 그리고 부민이 마음껏 기뻐하고 있을 때, 김해부사와 초계군수는 여세를 몰아 왜군의 뒤를 쫓아갔다. 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왜군이 고작 1천의 군사로 영남의 관문을 공략하지는 않았을 터이므로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의병장들의 충언보다 어서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있었던 것이다.
 
강창에서 초선(정탐선)을 타고 도망친 왜군의 뒤를 쫓던 김해부사와 초계군수는 미명 무렵 죽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초여름의 무성한 갈대숲 사이에 정박해 있던 왜군 3번대와 마주쳤다. 선발대로 보낸 1천 명 중 절반을 잃어버리고 노발대발해 있던 3번대 총사령관 구로다는 초선을 향해 조총과 화살을 퍼붓게 했다. 김해부사와 초계군수는 초선을 모두 빼앗기고 겨우 성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무찌른 적은 선발대에 지나지 않았소. 열 배나 되는 군사가 죽도에 상륙해 있었습니다. 김해성을 노리고 있는 왜군은 3번대 주력군이랍니다."
 
죽도에서 목격한 왜군의 규모를 알리는 김해부사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렸다.
 
"올 테면 오라고 하시오. 닥치는 대로 베어 줄 것이니."
 
우람한 풍채의 송빈이 칼을 뽑아 휘두르니, 김득기가 거들었다. 이대형은 겁에 질린 김해부사에게 창원에 있는 경상우병사에게 다시 지원을 요청하는 서찰을 보내도록 했다.
 
4월 18일 왜군이 죽도에서 김해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소문이 성내에 퍼지자 겁을 먹고 달아나는 부민과 군사가 속출했다.
 
"작은 공을 세우려다 목이 달아나게 생겼구나."
 
초계군수는 변방의 성에서 싸우다 죽게 될 것이 억울했다. 앞뒤 사정을 살피지 않고 군사를 끌고 온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하면서 초계군수는 달아날 기회를 노렸다.
 
4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왜군은 대대적으로 김해성을 향해 몰려왔다. 단숨에 성을 점령하려는 듯 왜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그 수가 1만 3천에 이르는 것을 보고 성내의 군사와 의병, 피난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저 예의를 모르는 도적놈들에게 순순히 성을 내줄 수는 없소."
 
왜군의 규모는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의병장들은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왜군은 시간을 끌지 않고 곧 첫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깊은 성호를 건너지 못한 왜군은 멀찌감치서 활과 조총을 쏘며 함성을 질러댔다. 그러더니 물러나 한참을 잠잠하다가 또 공격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왜군은 무기와 사다리를 들고 호에 뛰어들었다. 호에 뛰어든 왜군 중 일부는 물에 빠진 개미처럼 허우적거렸고, 또 일부는 무사히 호를 건너 성벽 아래에 도달했다. 그리고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성벽에서 지켜보고 있던 부민과 의병들이 성벽 아래로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었다. 성벽을 오르던 왜군이 비명을 지르며 호에 떨어졌다. 김해부사는 진남문에서, 초계군수는 해서문에서, 그리고 의병장들은 해동문과 공진문에서 그렇게 싸웠다. 두 번째 전투에서도 왜군은 성벽에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김해뉴스

 

조명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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