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열심히 했구나' 하고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했습니다. 열심히 하는 나를 내가 칭찬했고, 그럴 때 기분도 좋고 행복했습니다." 한국화가 임미애(57) 씨가 고등학교 시절을 추억하며 한 말이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앞서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이 아닐까. 그래야 자신의 세계를 지켜갈 수 있을테니 말이다. 임미애의 작업공간은 삼계동 '하빈갤러리'에 있다.

경주 출생이지만 부산에서 자라 '고향'
그림 소질에 '부산공예고' 진학 권유
금속공예·사진·도자기 등도 고루 섭렵

목정 문운식 한국화 매력에 결혼까지
1990년 김해로 오며 본격 작업 몰두
꽃·호랑이 이어 요즘엔 말 그림에 천착


두 달 전 삼계동에 자리 잡은 하빈갤러리는 복층구조이다. 1층의 작은 갤러리를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서면 임미애의 작업공간이다. 다락방이라고 하기에는 좀 크지만, 2층에 올라가니 조용하고 아늑한 기분이 든다. 임미애가 최근 그리고 있는 그림들이 보였다.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하나요?" 만나자 마자 임미애 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수가 적은 그로서는 지면 한 바닥을 가득 채우는 '공간' 인터뷰가 적잖이 부담되었나 보다.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며 김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부산공예고 동기들이며 후배들 이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신중한 성품,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챙기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기자로서도 그를 만난 날들 중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임미애는 경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산 토성동과 광복동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남포동에서 사업을 했어요. 그래서 남포동과 광복동 거리가 놀이터나 마찬가지였어요. '18번완당'과 빵집 '고려당'도 기억나요. 옛날 미화당백화점이 있던 자리에서 동주여상까지의 거리에 있던 찻집, 화방, 예쁜 소품들이 있던 리어카 난전…. 초등학교 시절에 부산의 원도심에서 자란 거죠. 그때 그 거리에는 부산의 문화와 예술이 다 모여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렸지만 그 때 보았던 풍경들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저한테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임미애가 중학생 때 가족은 양정으로 이사를 했다. 당시만 해도 부산진구와 북구가 같은 학군이어서 그는 양정에서 구포여중을 다녔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교생이 해운대로 사생대회를 갔어요. 학교 앞 종점에서 해운대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갔죠. 그 사생대회에서 제가 그린 그림이 2등인가를 했어요. '내가 그림을 잘 그리나? 구도를 잘 잡는 편인가?' 하는 생각을 했죠. 초등학교 시절에 형제들 중에서 크레용이나 물감을 제일 많이 쓰는 편이었고, 가끔 상도 받았지만 제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는 생각을 안했었거든요. 중3 담임선생님이 미술교사였어요. 조각을 하시는 엄철홍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해주셨어요. 부산공예고도 소개해주셨죠.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은 그림이 학교 복도에 걸렸을 때도 '왜 내 그림이?' 하는 생각을 했어요. 친구들이 복도를 오가면서 제 그림을 보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도 좋고 그랬죠. 그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는 부산공예고 금속공예과에 입학했다. "제가 다섯째 딸이었는데, 언니들이 일찍 결혼을 했어요. 언니들은 '학교 다닐 때가 좋다' '후회 없이 재미있는 학창생활을 보내라'라는 말을 해줬어요. 저도 정말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학교생활을 했어요. 과제도 성실하게 해 갔구요. 저는 친구들보다 실력이 뛰어나거나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기발한 면도 없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할 뿐이었죠. 전 노력형에 가까워요. 열심히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 재미있었어요."

▲ 복층구조의 하빈갤러리. 1층은 갤러리로 사용하며, 왼쪽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임미애의 작업공간이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것보다 스스로가 열심히 했다고 자신을 인정할 때가 더 좋았다고 털어놓았다. "금속공예과에 판금 과정이 있는데, 그걸 하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2학년 후반에 학교 정책상 금속공예과가 없어졌어요. 도자과로 옮기게 됐는데, 도자기 만드는 건 좋았지만 저한테는 좀 힘들었어요. 손에 열이 많은 편이거든요. 그러면 흙 반죽의 수분을 손이 빨리 빼앗아가게 되죠. 도자가 저하고는 잘 안 맞았던 거죠. 그리고 못 다 배운 금속공예에 대한 미련도 조금 있었구요. 학교 커리큘럼에는 그림과정이 있어서 그림은 계속 그렸어요."

임미애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키를 만드는 신발회사에서 도안사로 근무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무실 직원들을 모아 그림을 그리러 다녔어요. 처음에는 직원들에게 그림 그리는 걸 가르쳐주기도 했구요. 내원사, 석남사 등 부산 인근으로 다녔어요. 사실은 혼자서 그림을 그리러 가기가 좀 무서워서 그런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막상 도착하면 저는 혼자 그림 그리고, 함께 간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놀거나 연애를 했지요." 옛일을 추억하며 그는 활짝 웃었다.

주말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여자동기의 공방에도 꾸준히 다니며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림 그리고, 야간대학 사진학과도 다니고, 도자기를 만들고, 그렇게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계속 만들고 그리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자기를 만드는 여자동기가 "동래에서 한 해 후배인 문운식이 화실을 한다는데 한 번 가보자"고 말했다. 그는 목정 문운식의 화실에서 한국화를 보았다. "전 줄곧 유화를 그려왔기에 동양화에 그다지 매력을 못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데 목정의 그림은 달랐어요. 제가 현대 한국화를 만난 순간이었지요. '먹으로 이런 그림도 그릴 수 있구나' 하는 감동이 밀려왔어요.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와 목정의 화실을 들락거리다가 결혼까지 하게 됐지요."

▲ 한국화를 시작했을 때는 꽃을 그렸던 임미애 화가의 관심은 지금은 말로 바뀌었다. 경마장에서 가까이 말을 관찰했던 그의 그림에서 금방이라도 밖으로 말이 달려나올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나서 그들은 수영에서 화실을 함께 운영했다. "목정은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지만, 저는 그때까지도 그림을 좋아하는 단계였어요. 두 사람이 함께 그림을 그리고 화실을 꾸려간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김해로 이사를 온 것은 1990년. 화가 부부는 작품에 집중하기 위해 김해로 왔다. 임미애가 본격적으로 한국화를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유화의 두꺼운 질감을 참 좋아했지요. 그런데 한국화 물감도 농담을 조절하면서 유화처럼 불투명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거든요. 빨리 마르구요. 제가 좋아하는 작업의 특성을 한국화 물감으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한국화에 빠져들었어요."

목정 문운식의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임미애는 "남편이 다 그려주겠네?"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럴 때는 "나도 그림 그릴 줄 아는데?"하는 오기도 생겼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리자'는 생각을 했다. 목정은 산수화를 주로 그리고 있었다. 임미애는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서 그림을 그렸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내가 '이만하면 다 그렸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목정은 등 뒤로 지나가면서 '아직 멀었구만' 하고 슬쩍 한마디 던지는 거예요. 그럼 다시 붓을 들고 가서 더 그렸지요. 그렇게 제가 부딪히는 작업의 한계를 매번 뛰어넘을 수 있는 자극을 받았지요. 그 덕분에 작품에 조금은 깊이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미애는 자신의 성격이 조금 급한 편이라고 털어놓았다. "어느 날 목정이 호랑이를 그려보라고 권하더라구요. 호랑이 털을 한 올 한 올 그리면서 제 성격을 나름대로 다스릴 수 있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과정 전부가, 내 방식대로만 표현하고 전달하려던 좁은 안목을 넘어 폭도 넓어지는 길이었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 점차 작가가 되어갔던 거지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어 다른 일을 좀 해야 하나 하면, 목정은 늘 '쓸데없이 다른 일 하지 말고 그림 그려라'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나를 옆에서 북돋워주고 지지해주었습니다. 엄마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인정해준 아이들도 고맙구요. 가족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의 스승이에요. 그리고 제가 만난 사람들과 세상 모든 것이 다 제 그림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먼 훗날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공원에서 그림 그리는 '화가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그림을 좋아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스케치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화가 할머니라는 꿈은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보다도 더 예쁘다. 그리고 어쩌면 유명화가가 되는 것 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미애라면 온 동네 아이들이 '우리 동네 화가 할머니'라며 모여드는 그런 꿈을 이루어낼 것만 같았다.

≫임미애
한국미술협회 회원, 김해미술협회 부회장, 경남미술대전 초대작가, 김해미술대전 초대작가, 김해선면작가협회 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외 다수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숲갤러리 초대전, 경남한국화가 협회전 등 개인전·단체전 다수.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2회, 경상남도미술대전 입선 6회·특선 3회, 경남 추천작가상 수상.

김해뉴스 /박현주 기자 phj@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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